내 마음 속 어두운 똬리, 품고 가기로 했습니다 [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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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재 기자]
상쾌한 밤공기에 가득 담긴 솔향기에 이끌려 아내를 비롯한 친구들과 남한산성 밤산책에 나섰다. 북문 쪽 산책길을 따라 오르는데 오래됐지만, 너무도 익숙한 노래가 들려왔다. 나도 몰래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불렀다.
"눈으로 말해요, 살짝이 말해요.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 사랑은 눈으로… 에이, 젠장, 그럼 난 맨날 남이겠네."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하느라 저만치 앞서가는 아내를 대신해서 내 팔짱을 끼고 함께 걷던 선배 누나도 흥얼흥얼 따라 부르던 노래를 멈췄다.
"왜?"
너무도 감정 섞인 내 말투에 선배는 물론 나도 놀랐다. 나는 서둘러 웃으며 말했다.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만 말하고 눈으로만 사랑하자잖아. 그럼 나는 어떡하라고, 치사하게."
시력을 잃은 지 15년이 다 돼가니까 이제 없어질 만도 한데, 불쑥불쑥 농담이라고 내뱉은 말에 나도 몰래 속마음이 담겨 나올 때가 있다. 분명 화가 난 것도 아니고, 내 머릿속에서는 제대로 이성이 작동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숨겨진 감정이랄까, 내면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억울함이랄까, 하여튼 나도 그런 내 모습에 놀랄 때가 적지 않다.
놀란 선배 누나를 달래려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와 내 얘기를 듣고 있었는지 아내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얼마 전에 자기가 꿨다는 그 꿈도 그런 거 아녜요?"
"꿈? 무슨 꿈?"
"아, 별건 아닌데, 그래, 그것도 이상했지. 그게 말이야, 며칠 전 꾼 꿈인데…."
나는 또다시 장황한 꿈 이야기를 시작했다.
▲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의 꿈, 어쩔 수 없는 감정일지 몰라 두렵기도 하다 |
ⓒ 김미래/달리 |
오색 빛깔 화려한 등산복을 차려입은 친구들이 내게 손을 흔들고 앞장서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나도 지팡이를 고쳐 잡고 그 뒤를 따른다.
"오랜만이네."
친구가 다가와 묻는다. 나는 주위의 멋진 풍경을 둘러보느라 그 친구에겐 눈길도 주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인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스친다.
'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가? 어떻게?'
잔뜩 들뜬 마음에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혹시, 이게… 꿈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떠 본다. 몇 번을 반복해도 여전히 요란하게 떠드는 친구들이 보이고, 멋진 산과 하늘도 그대로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하다.
"아, 어떻게 된 거냐면, 유전자 치료법이 나왔거든."
묻지도 않은 옆 친구에게 말을 건네는데 내가 치료를 받은 기억이 없다. 맘속 서늘함이 농도를 더해간다.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보니, 옆에서 걷고 있는 친구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언제 치료를 받았냐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꿈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쳐내려 옆 친구에게 말을 걸려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벨소리가 들린다. 순식간에 모든 게 사라진다.
"정말 허탈하더라고. 근데 이상하게 그날은 한숨 대신 피식 웃음이 나왔어."
내 얘기를 듣던 선배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근데…, 난 잘 모르겠네. 그 꿈하고 맘속 감정이 튀어나오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아, 그게, 그 꿈이 너무도 생생하고 진짜 같았는데, 그 전에 꾼 비슷한 꿈하고는 기분 자체가 달랐거든."
그동안 숱하게 꾼 꿈속에서 나는 아이들과 공놀이도 하고, 운전도 하고, 영화도 보고, 친구들과 산에도 가고 캠핑도 하러 갔었다. 그리고 깨고 나면 여지없이 허탈했다. 심할 때는 자괴감과 억울함에 며칠동안 우울의 늪에서 헤맬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꿈은 이상하리만큼 생생하고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길몽이라고, 아마도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 같다고 했거든요. 근데, 이 사람이 하루 종일 끙끙대더라고요."
아내가 앞서간 친구들이 쉬고 있는 긴 의자로 나를 이끌면서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어. 근데, 그날 내내 그 꿈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라고."
분명 그동안은 이런 꿈을 꾸고 나면 온종일 기분이 별로였다. 그런데 그때는 뭔가가 아주 달랐고, 나는 그게 이상하고 궁금했다.
그날 우두커니 앉아서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차이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동안의 꿈에서는 볼 수 있게 된 내가 그냥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볼 수 있게 된 지는 언급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때 꿈은 내가 가고픈 등산보다는 유전자 치료를 통해서 내가 볼 수 있게 된 것이 중심이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치료를 받아서 볼 수 있게 됐다고 스스로 답을 했고, 떠오르지 않는 치료받은 기억을 되살리려 무척 애를 썼다.
"난 그게 영 개운치가 않더라고."
"왜? 치료받은 게 뭐가 어때서? 그리고 기분이야 그날 컨디션에 따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거 아냐?"
답답했는지 선배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게 말이야…"
사실 유전자 치료는 완치 확률도 낮았고 비용도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그렇기에 치료 목적으로 유전자 검사를 받기는 했어도 나는 크게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꿈에까지 나온 걸 보면, 내 머릿속 이성과는 달리 잠재의식이나 마음 속 깊은 곳 감정은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나는 문득 자괴감이 들었고, 불안해졌다.
볼 수 없게 된 내가 살게 된 세상은 볼 수 있었던 내가 산 세상과는 다른 게 많았다. 살면서 80% 심지어 90%까지 의지했던 시력이 사라졌으니 어쩌면 당연하겠는데 새 세상에 적응하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볼 수 없게 된 얼굴과 표정, 하늘과 구름, 산과 바다, 나무와 꽃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만 갔고, 하지 못하는 일과 놀이, 그리고 불편한 구경과 여행으로 인한 억울함도 점점 커져만 갔다.
다행히도 나를 감싸준 따뜻한 마음과 손길로 지금은 웃고 떠들 수 있게 됐지만, 솔직히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여전히 이런 그리움과 억울함이 똬리를 틀고 있다.
▲ 성난 코끼리가 될 수도 있는 맘속 똬리, 이건 누구나 품고 사는 인생의 짐이었다. |
ⓒ 김미래/달리 |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진 것 같지만, 내 맘속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이 그리움과 억울함의 코끼리는, 조련사를 자처한 내 머릿속 이성이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아도, 아무리 그런 상황이 아닌 걸 알고 있어도, 무슨 이유에선지 멋대로 화가 난 행동을 보여주곤 했다.
그런데 내 머릿속 이성이란 이름의 조련사는 감정의 코끼리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것에 놀라고 실망하면서도, 은근슬쩍 그 책임을 보지 못하는 내 눈에게 넘겨버리곤 했다. 그럼 또 다시 쳇바퀴 돌 듯 보지 못하는 그리움과 할 수 없는 억울함의 코끼리가 자극을 받게 된다.
"이렇게 감정에 휘둘리는 내가 너무 실망스럽더라고. 기대도 안 했는데 이렇게 꿈에까지 나와서 내 기분까지 좌지우지한다면, 만약 내가 그 치료를 못 받게 되거나, 받아도 별 효과가 없었을 때 도대체 얼마나 실망하고 좌절할까 싶어서 말이야. 그렇게 스스로 꼰대처럼 주의도 주고, 야단치고, 달래고 별짓을 다 했다 싶었는데… 여전히 이렇다니 좀 한심했어."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성벽 너머 세상의 화려한 불빛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근데 그 감정의 똬리 말이야, 그건 나도 갖고 있는 거 같은데, 그냥 사람이라면 다 갖고 있는 거 아닐까? 나도 힘들면 그 코끼리가 마구 날뛰던데…. 그건 없앤다고 없어지는 게 아닌 거 아닐까?"
선배의 말에 아내가 슬쩍 덧붙였다.
"그렇지. 안 그런 사람이 있을라고."
문득 이성선 시인의 <티벳에서>가 떠올랐다. 설산, 갠지스강의 발원인 저 높은 히말라야를 꿈꾸며 오르지만 그 산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시인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 …
생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많은 짐을 지고 이 고생이다"
산악인을 얕보는 것 같기도, 뭔가 허무하단 느낌도 지울 수 없었는데 번쩍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 마음 속 똬리, 그게 시인이 말하는 많은 짐이었구나.'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없는 산 위로 가는 게 아니라 가슴을 뛰게 하는 저 높은 산으로 가는 거였다. 우리의 인생도 아무것도 없는 끝으로 가는 게 아니라 삶을 누리며 즐기는 데 그 끝이 있는 것 뿐이었다. 어깨를 누르고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그 많은 짐도 마음 속 어두운 감정의 똬리도 그러려고 반드시 가져가야 하는 것이었다. 안타깝지만 그것 없이는 가슴 뛰는 경험도 할 수 없고, 삶을 누릴 수도, 즐길 수도 없기 때문에 시인은 고생하며 간다고 했나 보다.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품고 가야겠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데."
어느새 일어선 친구들이 바보처럼 웃고 있는 우리 세 사람에게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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