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전쟁을 멈출 수 없는 까닭

이용석 2024. 4. 2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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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박노자의 신간 <전쟁 이후의 세계 - 다원패권의 시대, 한국의 선택>

[이용석 기자]

 1988~2023년 지역별 세계 군사비 지출
ⓒ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
지난 22일,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2023년 세계 군사비 현황 보고서를 발표했다. 전 세계는 2022년에 비해 6.8%가 늘어난 2조 4430억 달러(약 3373조 원)를 2023년 군사비로 지출했다. 숫자가 이 정도로 커지면 감이 안 오는데, 1초에 1억 원씩을 군사비로 지출한 것이다.

2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새롭게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공격 및 학살과 이에 따른 중동 지역의 군사적 긴장 고조가 가장 큰 탓일 것이다. 전년 대비 군사비 지출에서 우크라이나(+51%)와 러시아(+24%), 폴란드(+75%)와 이스라엘(+24%)의 군사비가 가장 큰 폭으로 인상되었다.

지난 2년 동안 이어진 전쟁으로 3만 명 넘는 우크라이나 시민이 죽었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의 숫자를 세는 것이 무의미하고 무감각하게 느껴질 정도로 전쟁이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게만 느껴진다. 그렇지만 평화운동이 전쟁에 대해 무력감을 느낄 때 이를 가장 반기는 것은 전쟁을 지속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나는 기를 쓰고 무력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한다. 이 전쟁을 하루라도 앞당겨 끝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공부하고 생각하고 실천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해 한국의 활동가가, 한국의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이를 찾아보기 위해 박노자의 신간 <전쟁 이후의 세계-다원패권의 시대, 한국의 선택>을 읽었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역사적 지식을 자랑하는 박노자 선생의 장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책이었다. 국제 사회 강대국들의 지형은 어떻게 변화해 왔고 변해가는지, 러시아는 왜 전쟁을 시작했고 그만둘 수 없는지에 대해서 시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역사적 사례와 비교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미국 패권의 시대는 끝났다
 
 <전쟁 이후의 세계 -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 표지
ⓒ 한겨레출판
저자가 진단하는 국제 정세는,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미국 단일 패권의 시대는 끝이 났고 다원패권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찾아온 미국 단일 패권의 시대가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실패, 2008년 금융위기로 촉발된 미 제국의 약화로 주변 강대국들이 군사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역의 맹주들이 더 이상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패권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중요한 하위 파트너인 사우디아라비아의 행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러시아와 동반자적인 관계를 맺고 중국의 중재로 이란과 관계를 개선하고 있다. 과거라면 미국의 적대국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미국의 영향력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해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또한 이러한 맥락 속에서 가능했다고 진단한다. 

다만 미국의 패권이 끝났다고 해서 미국이 몰락한 것이라고 진단하지는 않는다. 미국은 여전히 금융, 문화, 학술영역 같은 연성권력을 막강하게 보유하고 있으며, 제조업 생산력에서 조만간 중국이 미국을 앞지르더라도 앞으로 다가올 세계는 중국이 미국의 단일 패권을 대체하는 세계가 아닌, 다극화된 세계라고 전망한다.

단일 패권 국가, 다시 말해 독불장군 깡패국가의 힘이 약해진 것이면 좋은 일 아닌가? 하지만 박노자의 생각은 다르다. 이런 다극화된 세력 균형에서 균형이 조금이라도 깨질 거 같으면 각국은 바로 군사적 대응에 나서기 때문에 오히려 전쟁의 위기가 심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러시아는 전쟁을 왜 멈추지 못하나

박노자는 러시아의 침공을 비판하면서도, 러시아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일부 좌파 논객들과는 다르게 이 전쟁의 원인을 나토의 동진에서 찾지 않는다. 나토와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이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러시아의 내부의 정치와 경제, 시민사회를 분석한다. 

러시아 내부의 정치적인 면에 대해서 박노자는 푸틴의 러시아는 비밀경찰 관료집단이 장악했다고 이야기한다. 정치적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고, 언론의 자유를 비롯한 시민적 정치적 의사표현이나 집단행동의 자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작년 병역거부 국제회의에 참석했던 러시아 평화활동가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단체 사진을 찍을 때 피켓으로 얼굴을 가렸고, 동영상 자료에서는 음성을 변조하고 얼굴을 가린 채 인터넷에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정부인 데다, 그 정부가 추진하는 개발 모델이 굳이 비교하자면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 전쟁 개입과 1970년대 한국에서 추진된 병영국가화 및 방위산업 발전에의 중점과 닮은 "국가 주도 개발 전략"이라고 평가한다(139쪽). 그렇기 때문에 박노자는 이 전쟁이 그리 쉽게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한국 전쟁의 종전을 원치 않았던 스탈린처럼 푸틴도 협상을 질질 끌면서 그에게 득이 되는 전쟁 행위를 계속할 가능성이 있다(140쪽)고 전망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군사케인스주의적" 경제 부양책으로 러시아는 2023년에 나름의 경제성장(약 3.5% 예상)을 이루려 하는데, 이는 예컨대 독일 등 침체에 빠진 유럽의 주요 경제들과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호전성은 네오나치 섬멸 따위가 이유가 아니라 "자본"이 "연성권력"의 측면이 약한 러시아 지배자들이 가장 쉽게 구사할 수 있는 정치 수단이며, 그 수단을 활용함으로써 러시아 국가와 자본은 "이윤"도 챙길 수 있(144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 내부에서 푸틴에 반대하거나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적인 움직임이나 시민 저항이 크지 않은 이유는 억압적이고 권위주의 정부라는 정치적인 면도 크게 작용하겠지만 박노자가 주목하는 것은 러시아 경제와 산업의 구조적인 측면이 시민들에게 끼치는 영향이다. 

러시아 국내 제조업의 대부분은 군수공업이거나 군수업체의 유관 기업이기 때문에 전쟁 없이는 전체 산업이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라고 한다. 한국 또한 군수산업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한국은 무역에 의존하는 수출 주도형 국가라서 전쟁이라는 불확실성이 커지는 것이 국가 경제에 마냥 좋은 일이 아닌 반면, 무역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국내 산업에서 군수산업의 비중이 한국보다 막대하게 큰 러시아는 전쟁이 없으면 국가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는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노동자가 2007년부터 현재까지 푸틴 정권에 의해 여섯 배나 증가한 군부 예산의 증액을 쌍수 들어 환영(45쪽)했고, 제조업에 종사하는 공장 노동자들이 국가의 무기 구입 예산을 늘리고 있는 현 정권이나, 그것보다 더 강하게 서방과 대립해 보다 많은 무기를 사들일 것으로 보이는 연방 공산당에 투표하는 추세(25쪽)라는 것이다. 

2022년 9월 푸틴이 동원령을 발표한 뒤 러시아를 탈출한 사람들 중에 제조업 노동자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생계가 저당 잡혀 국가에 포섭된 러시아 노동계급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러시아 군수공장 노동자들은 전시 동원 면제를 누린다고 하니 이런 정치성 성향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일면 이해가 간다. 

나는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한국 방위산업이 경상남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조선업과 같은 전통적인 중공업이 쇠퇴하면서 그 자리를 군수산업이 꿰차고 있는 형국이다. 경상남도 교육청이 무기박람회 아덱스에 자릿값이 수백만 원 하는 부스를 운영하는 것은, 이 지역들에서 군수산업이 생계를 책임져주는 일자리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한국은 러시아보다는 군수산업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낮고, 수출주도형 국가라서 전쟁 산업에 휘둘리는 경향도 덜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계급이나 시민들이 전쟁에 저항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측면만 보자면 평화활동가로서 이는 굉장히 큰 문제다. 군수산업의 비중이 커질수록 해당 지역은 전쟁에 찬성하는 여론이 힘을 가질 가능성이 높고, 그 지역의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은 이 여론을 대변할 것이다. 

전쟁을 억제하는 가장 큰 힘이 시민들의 저항에서 나온다면, 전쟁을 원하는 지배세력의 입장에서는 군수산업의 성장은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저항을 무마하는 효과적인 수단일 수 있다. 한국 평화운동이 이미 마주하고 있고, 앞으로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중단을 국가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드니프로 로이터=연합뉴스) 19일(현지시간)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은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의 한 아파트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 연합뉴스
 
러시아가 전쟁을 지속할 것이라는 박노자의 진단과 전망은 어두운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아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책에서 박노자가 강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시민들의 저항, 평화운동이다. 

강대국 사이의 세력 판도의 변화와 러시아, 우크라이나, 나토의 관계에 대한 지정학적인 분석을 보여주면서도 저자가 힘주어 말하는 것은 전쟁 시대에 평화 만들기란 국가에만 맡길 수 있는 과제가 아니고 시민사회와 그 구성원 각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15쪽)는 점이다. 

박노자는 오랫동안 일관되게 보여준 평화주의적인 통찰을 책 군데군데에서 보여준다. 징병제도의 등장과 발전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보편화되는 과정이 아니라 강제 국가 동원에 대해 지배세력이 시민들에게 일종의 보상책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다시 말해 총을 가진 남자가 투표를 하는 시민이 돼야 그 총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적어지기 때문에 투표권(영국의 경우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 징병을 실시하게 되자 1918년 모든 남자에게 투표권 부여)을 줬다(223쪽)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화된 남성은 물리적인 폭력을 수행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한국에서의 "군사 문화"는 오늘날 대체로 "규율"을 의미(154쪽)하며 이는 한국에서 군사주의의 목적이 살상 행위를 익히도록 하는 것이라기보다 제도적 폭력성에 대한 신체적인 순치를 체계적으로 강요(155쪽)하는 것이며, 초착취 본위의 한국형 자본주의의 축적 레짐에 정확히 맞춰진 "노동력 규율화 프로그램"에 더욱 가깝(155쪽)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현대의 전쟁에서 명분이 약한 제국주의적 전쟁에 징집병을 파병하는 것은 반전운동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고,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베트남전쟁과 반전운동 이후 미국이 1973년에 선구적으로 징집제를 폐지하고, 서구권 국가들 또한 1990~2000년대 미국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127쪽)는 이야기 또한 징병제와 반전운동의 연관관계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게 해 준다. 

이처럼 평화주의적인 시선을 바탕으로 박노자는 우크라이나 침공의 피해자인 우크라이나 민중과 러시아 독재의 내부적 피해자인 러시아 양심수와 반전운동가 돕기(15쪽), 전시 무기 판매 등으로 군수 복합체가 얻는 초과 이윤 등에 대한 '불편한 질문들'을 던져야(296쪽) 한다고 말한다. 결국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국제적인 연대와 저항을 바탕으로 한 시민들의 평화운동이라는 것이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전쟁없는세상에서는 동원령 이후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며,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지 않겠다며 러시아를 탈출한 러시아 병역거부자들을 한국 정부가 난민으로 인정하고 이들을 보호할 것을 촉구하는 서명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부디 우리의 노력이 더 많은 평화로, 전쟁 중단으로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와 필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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