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푸틴 인천 방문한 이유…한반도에 반복되는 바랴크史 [Focus 인사이드]

남도현 2024. 4. 2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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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대신 스스로 가라앉다

중국 랴오닝(遼寧)성의 항구도시인 다롄(大連)은 서해와 베이징(北京)의 외항인 톈진(天津)을 연결하는 보하이(渤海)만 초입에 있어서 군사적으로 상당한 요충지다. 지금은 다롄의 행정구역으로 병합된 인근의 뤼순(旅順)이 전쟁사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대륙 침략에 나서면서 뤼순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이어 혈전이 벌어진 장소였다.

1894년 뤼순 전투 당시 청군의 포대를 점령하는 일본군을 묘사한 그림. 10년 후 같은 곳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혈전을 벌였다. 위키피디아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타이완(臺灣)을 최초의 식민지로 획득했다. 만주에서 벌어진 전투 첫날에 함락시킨 뤼순을 포함한 랴오둥(遼東) 반도도 이때 함께 할양받았다. 하지만 러시아·프랑스·독일이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개입하면서 랴오둥 반도는 청이 돌려받았고, 이때부터 뤼순은 러시아의 조차지가 됐다. 압력에 굴복한 일본은 삼국간섭을 주도하고 눈독을 들이고 있는 조선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 중인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나빠졌다.

그럼에도 한반도와 대륙 진출에 대한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10년 후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기습을 가해 러시아 태평양 함대 주력이 주둔 중인 뤼순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고립된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이후 뤼순 일대에서 5개월간 양측 육군이 벌인 치열한 공방전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904년 제물포 해전 당시 항해 중인 바랴크함(왼쪽)과 코리에츠힘. 위키피디아

그런데 뤼순을 공략할 당시에 제물포(현 인천)에서도 규모가 작을 뿐이지 비슷한 양상의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서울을 거쳐 만주로 향하기 위해서 제물포에 상륙했는데, 그러려면 먼저 러시아의 방호 순양함 바랴크함과 포함 코리에츠함을 무력화시켜야 했다. 이들은 대한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제물포에 파견 나와 있던 중이었다. 물론 일본도 같은 이유로 제물포에 군함을 전개해 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뤼순 공격과 동시에 방호 순양함 나니와함이 이끄는 14척의 일본 함대가 제물포를 봉쇄한 뒤 육군을 상륙시켰다. 포위당한 바랴크함과 코리에츠함은 탈출을 시도했으나, 압도적인 일본 함대의 공격에 밀려 37명이 전사하고 190명이 다친 상태로 항구 앞바다로 후퇴했다. 이에 일본은 항복을 요구했으나, 러시아는 자침을 선택했다. 끝까지 싸우고 투항을 거부한 생존 승무원들은 이후 본국으로 송환돼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귀국 후 니콜라이 2세가 직접 참석한 환영대회에서 선물을 수여 받은 바략크함과 코리에츠함의 수병들.


지난 2013년 11월 23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외교 결례를 범하며 당일치기 방한이라는 기록을 남긴 적이 있었다. 당연히 일정이 빠듯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와중에도 그는 인천의 연안부두를 방문해 러일전쟁 당시 최후를 맞은 바랴크함과 코리에츠함의 전몰장병 추모식을 가졌다. 그 정도로 항복하지 않고 스스로 최후를 선택한 이들의 분투를 러시아는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반복되는 이름

그런데 이때 침몰한 바랴크함의 이후 행보는 상당히 흥미롭다. 상태가 양호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바랴크함을 인양해 수리한 뒤 훈련함으로 사용하다가 1916년 러시아에 되팔아버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며 연합국의 일원이 됐기에 가능한 거래였다. 다만 전투용으로 사용하려면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바랴크함은 이듬해 일본에서 무르만스크로 향하던 중 영국 리버풀의 카멜 레어드 조선소에 입고됐다.

그렇게 수리에 들어갔으나,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적군에 가담한 일부 수병들이 선상 반란을 일으켜 영국 정부와 대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혼란에 더해 수리비까지 체납되자 영국은 선체를 나포했다. 영국은 종전 후인 1920년 독일에 고철로 판매했다.

결국 바랴크함은 해체돼 용광로 속으로 사라졌다. 어이없는 말로였다. 결론적으로 바랴크함은 10년의 간격을 두고 전쟁을 벌였던 일본에게 치욕을 겪고 독일에게 최후를 당한 셈이었다.

우크라이나 61커뮤나즈조선소(현 미콜라이우 북부 조선소)에서 건조 중이던 쿠즈네초프함(오른쪽)과 바랴크함. 쿠즈네초프함은 전력화했으나 바랴크함은 소련 해체 후 건조가 중단됐다. 이후 중국에 고철 명목으로 팔렸다. Reddit


그래도 앞서 언급처럼 상당히 의의가 큰 함명이라 소련 해군은 1965년 취역한 킨다급 미사일 순양함 4번 함을 바랴크함이라는 이름을 승계시켰다. 이어서 1989년 항공모함 쿠즈네초프급 2번 함을 다음 바랴크함으로 명명하고 건조를 시작했다. 소련 최초의 본격 항모인 쿠즈네초프급은 미국의 항모를 제외한다면 최강이라 자부할 만한 야심작이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바랴크함은 70% 정도 제작된 상태에서 건조가 중단됐다.

소유권이 우크라이나로 넘어갔고 애물단지처럼 조선소에서 녹슬어갔다. 그렇게 사라질 것 같았던 바랴크함은 2001년 중국에 고철로 팔렸다. 그러나 고철로 쓰겠다는 중국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없었다. 당연히 판매와 이동 과정에 곡절이 많았다. 그렇게 2002년 바랴크가 한 세기 전에 발트 함대가 지나간 길을 따라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도착한 곳이 다롄, 즉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이 산화한 곳이었다.

바랴크함의 이름을 승계한 옛 소련의 미완 항공모함이 옛날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모항이던 다롄에서 개조돼 중국 최초의 항공모함 랴오닝함이 됐다. 돌고 도는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위키피디아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바랴크는 대대적인 수리를 거친 뒤 2012년 중국 최초의 항공모함인 랴오닝함으로 취역했다. 현재 랴오닝은 한반도와 서해를 통해 마주한 산둥(山東)성의 칭다오(靑島)를 모항으로 작전 중이다. 결과적으로 이름과 국적을 바꾼 바랴크함이 마치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열강들이 각축을 벌이던 한 세기 전처럼 다시 등장한 모양새가 된 것이었다. 당연히 우리에게 반가운 일은 아니다.

사실 바랴크함과 우리의 인연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바랴크함은 120년 전에 한반도를 놓고 제국주의 경쟁을 벌였던 열강의 침략 도구였을 뿐이다. 현재 바랴크 함명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배치된 슬라바급 순양함 3번 함이 계승했는데, 종종 인천을 방문해 전사자 위령 행사를 벌이고는 했다. 하지만 지역 시민단체가 침략 전쟁을 기리는 행위라고 반발했을 만큼 굳이 우리가 반겨 주어야 할 행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2014년 인천을 방문한 슬라바급 순양함 3번 함 바랴크함. 냉전 시대에는 대한민국 안보를 위협했고, 지금도 부담스러운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최상위 전투함이다. 인천항만공사


그동안 농담처럼 여기던 제정 러시아 시절 영토로의 회귀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푸틴 대통령의 진심임이 입증된 상태다. 따라서 푸틴 대통령이 인천까지 찾아왔던 것도 엄밀히 말해 한반도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제국주의 시대의 기억을 상기하려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현재는 유럽이 안보 위기를 느끼고 있으나 인천·다롄·바랴크가 반복되는 점을 보면 120년 전의 사건이 결코 과거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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