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증이면서 동시에 관음증 ‘앤디 워홀’ [유경희의 ‘연금술의 미술관’]

2024. 4. 27.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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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 최고 ‘관종’은 누구?

역대 최고 영향력 있는 예술가 앤디 워홀은 최초의 유명 유튜버였다.

1980년대 ‘앤디 워홀 TV’를 만들었던 그는 “조만간에 모든 사람은 단 15분 동안은 유명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구상 모든 이들에게 유명해질 15분이 주어질 걸 알았던 것! 그러니까 대중 다수가 유명해지고 싶어 하고, 유명인에 빠져 지낼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워홀의 예언은 이뤄졌고, 이로써 그는 사람이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첫 사례, 즉 예술가가 예술이 되는 초기 모델이 됐다.

어떻게 워홀은 미래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워홀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자기 욕망에 철저한 작가였다. 그런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두 개의 심리적 키워드는 노출증과 관음증이다. 그에게는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과 훔쳐보려는 욕망이 아주 기묘하게 맞물려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노출증은 그저 드러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드러내는 동시에 숨기는, 매우 전략적인 것이었다. 파티와 미디어에 끊임없이 자신을 노출시켰지만, 모두 고도의 연출된 모습이었다. 사적인 모습을 본 사람은 극소수였는데, 이 또한 스스로를 신비롭게 무장하기 위해 ‘의도된 은폐’라고 볼 수 있다.

워홀의 인터뷰는 이를 증명한다. 그의 답변은 다소 어눌하고 짧고 애매했는데, 개인적인 질문은 거의 회피하거나 모호하게 대답하기 일쑤였다. “당신의 어떤 작품을 봐도 당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없어요. 보여주기 싫은 거죠?”라고 기자가 질문하자, 워홀은 “저에 대해 별로 보여줄 게 없거든요”라고 답했다. 그는 자신을 신비주의로 연출하는 편을 택했다. 그러나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는 말처럼, 실제 자기의 본모습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워홀은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누굴 만났는지, 택시비와 식대는 얼마였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전날 일어났던 아주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일일이 받아 적게 했다. “레스토랑 브라세리에서 식사를 했다($40).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서 기가 죽어 쓸쓸하게 집으로 갔다. 부활절. 울었다(1981년 4월 17일 금요일).” 이것이 바로 워홀이 죽고 난 후 2년 후에 출간된 책 ‘앤디 워홀의 일기’에 나온 내용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일기가 통상 밤이 아닌, 매일 아침 9시 30분 비서 패트 해켓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 이는 ‘일기’가 ‘작업’이자 ‘업무’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워홀은 자신이 브랜드라는 사실, 즉 자신의 일거수일투족과 사소한 감정까지 모두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영민하게 파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워홀의 노출증과 상반되는 비밀스러운 것들 중 가장 큰 호기심의 대상이 됐던 것은 그의 성적 정체성이나 취향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기자가 그에게 “무성애자라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또한 “섹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생각 안 해요(I don‘t)”라고 짧게 응수하는가 하면, “팝콘을 만들어 침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라며 허를 찌르는 답을 했다. 사실 그는 동성애자라고 대답하는 대신 무성애자라고 대답하는 것이 자신에게 훨씬 더 이롭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성욕을 내보이면 약점을 잡히거나 자신의 권력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는 언제나 섹스를 초월한 존재처럼 행동했다. 충분한 답변을 얻지 못한 미디어의 궁금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얼마나 노련한 미디어 플레이어인가!

(1) 예술가가 예술이 된 첫 번째 사례의 앤디 워홀.
(2) 앤디 워홀이 가장 좋아한 건 돈, 앤디 워홀, 달러 사인, 1982년. (3) 앤디 워홀의 관음증의 초절정을 보여주는 남성누드 작품집.
무성애자 가면 쓴 ‘퀴어’ 워홀

그렇다면 워홀의 성적 지향성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은 은폐된 채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흥미롭다. 워홀은 무성애자인 양 “가장 흥분되는 것은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에이즈에 감염될까 봐 극도로 두려워했다. 동성애자였음이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홀은 실제로 성행위를 하는 것보다 성에 관한 것을 보거나 읽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더 이상 은밀한 절시증자가 아닌 대놓고 관음증자였던 그는 젊은 남자들의 육체를 철저히 탐사했다. 건장한 체구의 젊고 잘생긴 남자를 선호했기에 수많은 남자를 만나고 다녔다. 자주 게이 바에 드나들었지만, 그 세계에서 주목받기에는 자신의 외모가 너무 형편없다는 사실에 주눅 들어, 그저 조용히 앉아서 그들을 주시하고 관찰했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호감 가는 남자들에게 음경을 그려도 괜찮은지를 묻고 다녔다. 워홀의 말투는 거슬리지 않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허락을 얻어냈고, 대부분 그들을 작업실로 데리고 와 그리거나 찍을 수 있었다.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공식적인 발언을 한 적이 없는 워홀은 연인 관계를 쉬쉬했지만, 사실 많은 남성과 사귀었다. 그리고 이는 그의 퀴어적인 작품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요긴하다. 10여년 동안의 일기가 공개된 후 워홀이 좋아하는 남성 취향이 ‘프레피 스타일(preppy style)’ 즉 비즈니스 스타일인 동시에 ‘와스프(WASP) 스타일’임이 밝혀졌다. 체코 이민자 출신 피츠버그 촌놈으로 미국 상류 중산층이 되고자 했던 그만의 수치심과 콤플렉스가 그대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워홀은 차갑고 건조하고 창백한 무성애자로 포장됐지만, 사실 굉장히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랑에 굶주린 남자, 평생 사랑을 찾아 헤매 다녔던 남자였다.

한 남자와 결별하자마자 외로움에 사무친 그는 평소에 봐뒀던 아들뻘 되는 남자를 적극적으로 유혹한다. 바로 파라마운트 부사장 존 굴드(1953~1986년)로 외모가 출중할 뿐 아니라 미국 주류층이 되고자 하는 그의 열망에 딱 들어맞는 존재였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상태였던 굴드는 처음에는 거절했고, 계속 이성애자처럼 행동했다. 그것이 워홀을 더욱 긴장시키고 흥분시켰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워홀이 훨씬 더 로맨틱하고 감정적인 관계를 원했다. 당시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며 유지됐던 관계 속에서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진정 애틋한 사랑 그 자체다. 이렇듯 워홀은 사랑에 빠질 때마다 애정 어린 편지를 쓰고, 시를 쓰고, 꽃과 선물을 보내는 한편, 차원이 다른 럭셔리한 삶과 경제적 안정성을 제시하며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그럼에도 그 역시 맘대로 되지 않는 사랑에 목매었고, 애달파했다.

이제야 노출과 은폐의 귀재 워홀의 그 유명한 아포리즘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는 역설이었다. 워홀은 대중들의 편견, 그러니까 그가 감정이 없는 사람이고, 평생 사랑에 빠진 적이 없을 것이며, 더불어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편견과 상반되는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기계가 더 문제가 적다”는 말은 어쩌면 모든 인간관계와 애정관계에서 받은 상처와 자기 연민에 대한 역설적 토로가 아닐까.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6호 (2024.04.24~2024.04.3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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