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반도체 시대, 또 다른 게임 체인저…‘유리 기판’ 전쟁
최근 반도체 기판 부문 최대 화두는 ‘유리 기판(Glass Substrate)’이다. 인공지능(AI) 시대와 맞물려 새로운 게임 체인저로 부상했다. 전자부품 업체들은 앞다퉈 관련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그간 유리 기판 개발을 주도해온 SKC와 인텔은 물론이고 삼성전기와 LG이노텍도 참전을 선언했다.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은 유리 기판 시제품을 2025년 선보이고 2026년과 2027년 중 양산 계획을 밝혔다. 문혁수 LG이노텍 대표도 지난 3월 주주총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고객사들의 유리 기판 관심을 강조하며 LG이노텍 역시 이를 준비 중이라고 강조했다.
기술 한계 넘고 효율도 잡아
유리 기판을 이해하려면 먼저 ‘반도체용 기판’과 ‘인터포저(Interposer)’를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전자기기를 뜯어보면 나오는 초록색 판이 기판이다. 진짜 이름은 인쇄회로기판. 영어로는 Printed Circuit Board다. 전기 신호가 지나가는 회로가 인쇄된 보드로 직역할 수 있다. 기판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중개업자다. 반도체 칩과 전자기기 속 메인보드를 연결한다. 반도체 칩의 전기 신호 통로 간격은 상당히 미세하다. 메인보드 통로 간격과 차이가 크다. 이에 기판은 반도체 칩 통로에 맞게 전기 신호를 받고 이를 메인보드에 맞춰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AI 반도체 시대와 함께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반도체 칩 통로가 늘면서 간격이 더 좁아졌다. 중개업자 기판 홀로 감당할 수준이 아닌 상황. 결국 기판은 일부 업무를 하청 맡긴다. 이를 담당하는 곳이 바로 인터포저다. 인터포저는 까다로운 고객 반도체 칩과 마주하며 전기 신호를 받아들인다. 그러곤 기판 수준에 맞춰 이를 전달한다. 인터포저는 보통 ‘유기(Organic) 소재’를 활용한다. 실리콘(Si) 소재가 워낙 비싼 탓이다. 하지만 사공이 많아지고, 유통 과정이 복잡해지면 문제가 생기는 법. 인터포저 등장과 함께 기판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다.
유기 인터포저는 기술적 한계를 갖고 있다. 일단 열에 약하다. 기판 위에 붙어 있는 인터포저가 열에 약하다 보니 기판이 휘는 현상인 워피지(Warpage)가 잦아졌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AI 반도체 시대와 함께 데이터 처리량이 급증, 반도체 칩에 의한 열은 계속해서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열에 약하다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다. 또 다른 문제는 면적이다. 최근 반도체 트렌드 중 하나는 ‘기판 위에 더 많은 칩을 올려라’다. 그런데 기판 위에서 일을 하는 인터포저의 경우 분명한 사이즈 한계가 있다. 여기에 평탄도 역시 고르지 못해 회로 설계 미세화에 적합하지 않다. 기판이 믿고 일을 맡기기에는 수많은 리스크가 존재하는 셈이다.
대안을 고민하던 기판 업계가 떠올린 아이디어가 ‘유리 기판’이다. 유리 기판은 일단 상대적으로 열에 강하고, 평탄도 역시 고른 편이다. KB증권이 펜실베이니아주립대(펜스테이트) 자료를 인용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유기 소재의 열 팽창 계수는 3~17ppm/K이다. 반면 유리 기판 열 팽창 계수는 3~9ppm/K이다. 최대치를 비교하면 절반 정도로 낮다. 또 표면의 거칠기도 유기 소재는 400~600㎚ 수준인 반면 유리 기판은 10㎚ 이하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유리 기판은 인터포저 없이 반도체 칩과 메인보드를 연결할 수 있다.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 성능은 개선하고, 비용은 줄일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이창민 KB증권 애널리스트는 “유리 기판은 유기 소재보다 딱딱해서 세밀한 회로 형성이 가능하고, 열과 휘어짐에 강하다”면서 “전력 소비도 우수해 ‘꿈의 기판’으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앞서가는 SKC 뒤쫓는 삼성
이에 주요 빅테크를 중심으로 ‘유리 기판 공급망’ 구축에 나선 상태다. 대만 산업지 디지타임스와 미국 IT 전문지 나인투파이브맥은 최근 애플이 차세대 모바일 프로세서(AP)에 기존 기판 대신 유리 기판 적용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AMD 역시 여러 기판 업체와 유리 기판 성능 평가를 진행하는 단계로 알려졌다. 유리 기판 채택에 가장 적극적인 인텔은 10년 전부터 유리 기판 상용화를 준비했다. 공급망을 구축하는 동시에 일부 물량은 직접 생산하는 전략을 세워둔 상태다. 지난해 9월에는 유리 기판을 적용한 반도체 시제품을 공개하기도 했다.
반도체업계 큰손들이 유리 기판을 찾기 시작하면서 주요 전자부품 업체들도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기와 SKC는 유리 기판 상용화 전쟁 참전을 공식화했고, LG이노텍도 사실상 뛰어든 상태다. 다만 전문가들은 단기간에 상용화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유리 기판의 치명적인 단점 때문이다. 유리 기판은 외부 충격이나 압력에 취약하다. 이에 수율(제조품 중 양품 비율)을 개선하는 게 쉽지 않고, 유리 기판 적용 시 반도체 기업 입장에선 제품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다. 결국 전자부품 업체 중 누가 먼저 수율을 잡느냐에 따라 유리 기판 패권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가장 앞서 있는 기업은 SK그룹 계열사 SKC다. SKC는 2021년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업체인 미국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와 유리 기판 합작사 앱솔릭스를 설립했다. 최근 미국 조지아주에 세계 최초 반도체 유리 기판 공장 ‘조지아 1공장’을 건설했다. 2분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공장 가동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조지아 1공장은 2022년 11월 착공, 2억4000만달러(약 3200억원)가 투입됐다. 연산 1만2000㎡ 규모 유리 기판 생산능력을 갖췄다. 규모만 보면 조지아 1공장은 소규모 생산시설(SVM)이다. 주로 고객사에 제공할 시제품을 양산할 전망이다. 앱솔릭스는 대량 양산을 위한 조지아 2공장 설립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기도 최근 유리 기판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발·생산에 속도를 내겠다는 방침이다. 삼성전기는 지난 2월 미국에서 열린 CES 2024에서 2026년까지 유리 기판 양산 체제를 갖추겠다고 발표했다. 최근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은 기자들과 만나 “2025년 유리 기판 시제품을 낼 것”이라며 “이를 위해 올해 세종 사업장에 파일럿 라인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기는 현재 유리 기판을 원하는 고객들과 협의 중인 단계로 알려졌다. 시제품 양산 이후 본격적인 상업 생산 시점은 2026~2027년으로 예상된다.
LG이노텍도 한발을 걸쳐놨다. 문혁수 LG이노텍 대표는 지난 3월 21일 주주총회 직후 “주요 고객이 미국의 큰 반도체 회사인데 유리 기판에 관심이 많다”며 “당연히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반도체 기판 세계 1위 업체로 꼽히는 일본 이비덴 역시 지난해 10월부터 본격적인 유리 기판 R&D에 착수했다. 고의영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주요 반도체 업체가 2026~2027년 이후 도입을 계획하고 있으므로 관련 공급망의 이익 기여를 논하기 이른 시점”이라면서도 “다만 역사적으로 기판 소재는 변화해왔고, 새로운 변곡점이 가까워졌다는 방향성에 주목할 필요는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6호 (2024.04.24~2024.04.3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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