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모델도 "정말 섹시"…과시라도 좋아, Z세대 뜨는 '텍스트 힙' [비크닉]

유지연 2024. 4. 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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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트렌드

「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일들도 반복되면 의미가 생깁니다. 일시적 유행에서 지속하는 트렌드가 되는 과정이죠. 트렌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가치를 반영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모호함을 밝히는 한줄기 단서가 되기도 하고요.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트렌드를 건져 올립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에서는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서 유의미한 ‘통찰(인사이트)’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 시청역 인근 서울광장을 들렀다가 반가운 모습을 봤어요. 푸른 잔디밭 위 빈백에 앉아 책을 읽는 시민들이었죠. 지난 18일부터 열리고 있는 ‘서울야외도서관’ 행사였는데요, 서울광장 뿐 아니라 광화문광장·청계천 등 3곳에서 오는 11월 10일까지 운영된다고 해요.

서울광장에서 열린 야외도서관 행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시민. 사진 연합뉴스

이들에게 눈길이 안 건 그만큼 책을 읽는 모습을 보는 게 흔치 않아서예요. 좀처럼 손에서 떼지 못하는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로 활자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 안 드나요?

실제로 지난 18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3 국민독서실태조사’의 결과는 충격적이었어요. 지난해 우리나라 성인 10명 가운데 약 6명이 1년간 책을 단 한권도 읽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죠. 일반 도서를 한권이라도 읽거나 들은 성인의 비율을 뜻하는 종합독서율이 43%에 그쳤다는 건데요, 첫 조사를 시작한 지난 1994년에는 이 비율이 86.8%에 달했다고 하네요. 책 읽는 사람이 점점 희귀해진다는 의미죠.

성인 기준 최근 1년 내 1권 이상 책을 읽은 비율인 종합독서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사진 2023 국민독서실태조사

오늘 비크닉은 이렇게 엄혹한 독서 멸종의 시대에 미약하나마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바로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으로 통하는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 사이에서 독서가 ‘힙한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는 거죠. 어떤 이야기인지, 들어볼까요?


“독서는 섹시하다”


지난 2월 영국 가디언은 ‘Z세대가 책과 도서관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보도했어요. 1997년에서 2012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 종이책을 선호하고 있고, 지난해 영국에서의 책 판매도 역대 최고 수준(6억 6900만권)을 기록했다는 내용이죠. 그 근거로 Z세대를 대표하는 모델 카이아 거버(Kaia Gerber)가 최근 독서 클럽을 만들면서 “독서는 정말 섹시하다!(Reading is so sexy!)”고 말한 인터뷰를 인용했죠.
카이아 거버가 미국 작가 클레오 웨이드와 책 '사랑을 기억하라(Remember Love)'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습. 사진 인스타그램
실제로 Z세대의 소셜 미디어로 통하는 틱톡에서 해시태그(#) ‘북톡(booktok)’을 검색하면 수십만 건의 게시물이 떠요. 주로 자신이 읽은 책을 소개하고, 책을 추천하는 콘텐트죠. 국내서도 소셜 미디어에 독서 경험을 공유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인스타그램에서 ‘북스타그램’ 해시태그(#)가 달린 게시물은 23일 기준 590만 건에 이르죠.
틱톡에서 'booktok(북톡)' 해시태그로 검색된 결과물. 수 많은 이들이 자신이 읽은 책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틱톡
젊은 세대의 독서 붐은 거의 모든 유행이 그랬듯 셀럽(유명인)과 소셜 미디어와 함께 자라나고 있어요. 국내서도 카이아 거버처럼 셀럽들의 독서가 소소한 화젯거리가 되고 있으니까요. 걸그룹 르세라핌의 허윤진은 Z세대 사이 책 전도사로 통해요. 지난 2월 예능 프로 ‘전지적 참견 시점(MBC)’에 출연해 대기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고 필사를 하는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죠. 출국 길 공항에서도 책을 들고 나타나 ‘공항 패션’ 대신 ‘공항 책’이라는 트렌드도 이끌었고요. 이른바 ‘허윤진 책 리스트’는 Z세대의 독서 욕망을 자극하고 있어요.
걸그룹 르세라핌의 허윤진은 책 읽는 아이돌로 유명하다. 사진 전지적 참견 시점 화면 캡처

진짜 독서 VS 과시


이런 현상을 두고 ‘과시 행위로서의 독서’라는 지적도 나와요. 책을 읽는 모습이 ‘있어 보이는 취미’가 됐다는 거죠. 소셜 미디어에 책 표지를 찍어 올리거나, 책을 쌓아둔 이미지를 올리는 경우가 대표적이죠.
올해 초 문을 연 수원 스타필드 내 별마당 도서관 전경. 사진 연합뉴스
책을 이미지로서 소비하다 보니 인테리어에 활용하기도 해요. 서울 삼성동 코엑스의 랜드마크인 ‘별마당 도서관’은 상당한 면적의 공간을 모형 책으로 채우고 있죠. 올해 초 개장한 스타필드 수원의 별마당 도서관도 사람 손이 닿지 않는 22m 높이 서고에 모형 책을 가득 꽂았고요. 사람들은 압도적 책의 전당처럼 보이는 이곳에서 ‘인증샷’을 찍고요.

인테리어용 모형책도 실제 팔리고 있어요. 포털 사이트에 ‘모형책’을 검색하면 장식용책·모형책·가짜책 등의 상품이 수천 원대로 팔리고 있어요. 감각적인 폰트와 표지를 지닌 책 형태로 속이 비어 있어 안쪽에 리모컨 등 물건을 수납하게끔 되어 있는 경우도 있어요.


‘책’으로 팝업 스토어


그렇다고 책에 대한 관심을 단순히 과시라고 치부하기에는 아쉬워요. 설사 실제 책을 읽지 않더라도, 독서와 책에 대한 호감은 분명 높아지는 추세예요. 디지털에 익숙한 젊은 세대일수록, 책을 읽는 사람이 멸종에 가까워진 시대일수록 독서가 희소하고도 귀한 콘텐트로 작용하기 때문이죠.
출판사 창비는 창비시선 500호 발간을 기념해 팝업 스토어 '시크닉'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 창비
출판업계에서도 이런 변화를 감지하고 있어요. 최근 들어 젊은 세대들이 선호하는 팝업 스토어를 활용해 책을 홍보하는 사례가 늘어난 이유죠. 출판사 창비는 지난 19일부터 서울 망원동 디콜라보에서 팝업 스토어 ‘시크닉’을 운영하고 있어요. 창비시선 500호 기념시선집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출간을 기념해 한정판 굿즈와 전시, 체험 행사를 선보이는 곳이죠. 시에 어울리는 향과 음악을 추천하고, 시 구절의 뒷부분을 이어 자신만의 시를 써보는 체험 행사를 해요. 지난해 9월 문학동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출간을 기념해 서울 성수동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스테이션’이라는 팝업스토어를 개장해 긴 대기 줄을 세우기도 했어요.
지난해 9월 서울 성수동에서 열린 '무라카미 하루키 스테이션' 팝업에 입장하기 위해 관람객들이 줄 서 있는 모습. 사진 문학동네 인스타그램
김소연 창비 마케터는 “시 부문에서만 보면 10·20독자들이 늘어나는 흐름은 분명히 있다”며 “음악처럼 읽고 있는 책이 나를 설명하는 방식이 됐고, 소셜 미디어 피드에 책 사진 하나 정도는 올리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젊은 세대들의 관심을 독려하기 위해 어려운 한자어 대신 ‘시’와 ‘피크닉(소풍)’을 섞어 이름을 짓고, 소풍가듯 가볍게 시를 체험해보라는 의미의 팝업 스토어를 연 것”이라고 설명했어요.

텍스트는 귀하다, 그래서 ‘힙’하다


글자보다 이미지와 영상에 익숙한 시대가 되면서 몇 년 전부터 ‘문해력’이 화두가 되고 있어요.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이죠. 그래서일까요, 글과 책, 독서 경험에 대해 예전보다 새삼스럽게 반응하는 건 사실이에요. 노트에 좋아하는 책의 구절을 적어내려가는 ‘필사’가 유행하고, 돈을 내고 책을 읽는 독서 모임도 흔해졌어요.
자신의 필사나 기록의 흔적을 소셜 미디어에 아카이빙 하는 경우가 많다. 사진 인스타그램
흥미로운 점은 Z세대들의 독서에 대한 관심이 오로지 ‘종이 책’으로만 수렴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전자책을 읽고, 디지털 필사를 하고, 독서도 디지털로 인증하는 이들이 많으니까요. 30년 역사를 자랑하는 타자 연습 프로그램 ‘한컴타자’는 지난해 8월 리뉴얼 버전을 내면서 디지털 세대를 겨냥해 교보문고와 제휴해 소설·수필 등을 필사하는 기능을 탑재했어요.

메타는 지난해 7월 텍스트 기반 소셜 네트워크인 스레드(Threads)를 공개했어요. 또한 최근 인스타그램에서는 ‘매거진’을 자처하는 계정이 늘고 있기도 해요. 자신의 취향을 글과 사진을 기반으로 공유하는 일종의 사적인 온라인 매거진인데, Z세대가 직접 운영하고 팔로워도 대부분 Z세대라는 점이 공통적이죠. 요즘에는 인플루언서보다 이런 매거진 계정을 팔로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해요.

다시 ‘2023 국민독서실태조사’로 돌아가 보면 종이책 독서율은 지속해서 떨어지고 있지만, 전자책과 오디오 북 독서율은 높아지는 추세예요. 초·중·고 학생 기준 최근 1년 내 전자책을 1권 이상 읽은 비율은 51.9%로 나타났어요. 지난 2019년 37.2% 대비 확실히 늘어난 수치죠.

초,중,고 학생 기준 최근 1년 내 전자 책을 1권 이상 읽은 비율은 증가 추세다. 교과서나 참고서, 수험서는 제외한 수치다. 사진 2023 국민독서실태조사

종이에 인쇄된 활자든, 디지털 매체로 공유되는 텍스트든 중요한 건 읽기와 쓰기에 관련된 텍스트 기반 콘텐트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는 점이에요. 이미지·영상 콘텐트의 홍수 속에서 자라난 Z세대들이 역으로 텍스트 기반 콘텐트를 쿨하다고 여기면서 생겨난 현상으로 봐요. 사실 과시면 어떻고, 보여주기 식이면 어떤가요. 그렇게라도 독서가 힙해질 수 있다면,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더 텍스트가 주는 기쁨에 빠져들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은 것 아닐까요.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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