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 뒷마당에선 나무도 글을 읽나... 조선시대 두 여성의 발자취

김은진 2024. 4. 27.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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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으로 떠난 문학기행... 재능 펼치지 못한 허난설헌을 찾다

[김은진 기자]

▲ 강릉 오죽헌 25일 신사임당과 율곡이이의 생가인 오죽헌의 모습
ⓒ 김은진
지난 25일, 강원도 강릉 오죽헌과 허난설헌 생가를 찾았다. 청명한 푸른 하늘, 봄바람에 한들거리는 초록 잎사귀들, 진한 향기를 내는 붉은 목단향이 여행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안양문인협회에서 강릉으로 문학기행을 떠났다.

신사임당과 이이의 생가 오죽헌

첫 방문지는 오죽헌(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이었다. 이곳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생가로 신사임당이 아이를 출산한 몽룡실도 있다. 오죽헌은 그리 빼어난 경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정했고 시야가 탁 트여 시원했다.

신사임당(1504~1551)은 조선 중기의 여성 예술가이다. 4남 3녀 중 3남인 율곡 이이는 6세까지 이곳에서 자랐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우리나라 화폐에 새겨져 있고 교육열이 뜨거운 우리나라에서 신사임당은 자식을 성공시키고 자신도 명예를 얻은 선망의 대상이다. 이런 경우가 흔하지 않아서 더욱더 이들 모자를 부러워하는 것 같다.

신사임당은 결혼 후에도 20년이 다 되도록 친정에서 지냈다. 신사임당에게는 아들 형제가 없어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된 어머니를 돌보며 아들 노릇을 했다고 한다. 조선 중기, 신사임당이 살던 시절에는 여성이 결혼 후에도 친정에 머물며  지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요즘이야 그런 경우가 많지만 유교 사상이 팽배한 조선시대에 딸이 친정 부모님을 모시며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니 신사임당이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시댁도 친정도 신사임당의 재능을 인정해서 다른 일보다도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특별히 더 많이 배려를 해주었을 것이다.

신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도 아내의 예술 작품만큼은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비록 주막집 여인을 사랑하여 그녀를 후처로 맞아들였지만 말이다. 신사임당은 사망하기 전에 아이들을 생각해서 재혼은 하지 말아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저승에서 이원수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 오죽헌의 검은 대나무 25일, 강릉 신사임당의 생가인 오죽헌의 대나무숲
ⓒ 김은진
 
오죽헌 뒷마당에 울창한 까만 대나무숲에선 바람 따라 흔들리는 댓잎 소리가 사라락사라락 마치 책장을 넘기는 듯했다. '이곳에선 나무들도 글을 읽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가지에서 옆에 있는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신사임당의 명작이 전시되어 있었다. 초충도와 수박과 들쥐, 가지와 방아깨비 등 여러 작품이 있었다.

조선시대 오죽헌의 풍경이 그대로 녹아 있는 아름다운 작품들이었다. 작품을 감상하고 그녀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친정에 머물며 부모님을 곁에서 모시며 아이들과 보낸 즐거운 날들이 그녀도 아이들도 잘 성장시킨 것 같다.

다만 아쉬운 건 신사임당이 예술인으로 보다는 아들인 이이를 9번이나 장원급제시킨 훌륭한 어머니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문득 율곡 이이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관직에 올라 무엇을 이루었는지 그의 업적과 주요 사상인 '이기론'보다는 신사임당의 아들로 더 잘 알려지진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생이 안타까운 천재 허난설헌의 생가
  
▲ 허난설헌의 생가 25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허난설헌의 생가에는 봄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었다.
ⓒ 김은진
다음으로 허난설헌의 생가(강릉시 난설헌로 193번길 1-15)로 향했다. 경포호와 마주 닿아 있는 생가는 아기자기한 정원에 목단과 명자꽃, 철쭉이 한창이었다. 장독대에는 겹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소박하지만 다 정감이 가는 곳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당과 안채, 사랑채 그리고 곳간에서도 어린 허난설헌과 둘째 오빠 허방, 남동생 허균이 모여 앉아 상상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웃었을 모습이 그려졌다.

허난설헌은 신사임당과 달리 결혼하고 친정에 발걸음을 못했다. 자유분방한 친정과는 달리 엄한 시댁에 살며 뛰어난 재능을 칭찬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 남자의 아내로 조용히 살기를 강요받았던 것 같다. 남편이 과거 시험에 낙방하는 게 아내 노릇을 제대로 못해서 그렇다며 억울한 소리도 들었다. 결혼 생활이 화목하고 행복하면 친정 나들이도 자주 했을 테지만 이렇게 불화 속에서 지내니 친정에 가서 가족들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는 냉담한 시댁 어른들과 다른 여인에게 자꾸 눈길을 주는 남편 김성립에게 받은 상처를 견디며 살았다. 어느 날 전염병으로 어린 딸과 아들을 모두 잃고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을 한 허난설헌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2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뒤흔들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이는 시드는 것일까.

남편 김성립은 뛰어난 허난설헌에게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공부도 멀리하고 기방을 드나들며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허난설헌이 사망한 다음 해에는 과거급제를 했다고 한다. 남존여비사상에 물들어 보석 같은 아내를 두고도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속만 썩인 남편이었다니 그녀의 죽음이 더 안타까웠다.

그녀는 유언에서 자신의 시를 모두 불태우라고 했지만 허균은 그녀가 친정에 남겨놓은 시와 허균 자신이 외우고 있던 시를 모아 '난설헌고'를 출간했다. 사망한 지 이듬해 중국 명나라까지 시집이 알려지면서 천재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생가의 방 한편에는 허난설헌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앞에 시 두 편이 전시되어 있었다. '딸·아들 여의고서'라는 시와 '연꽃 따는 노래'이라는 시였다. 남편을 향한 애정을 표현한 시인데 읽으면서 더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연꽃 따는 노래>
                           허난설헌

가을이라 맑은 호숫물 옥돌처럼 흐르는데
연꽃 피는 깊은 곳에 난초배를 매어 두고
물 건너 임을 만나 연밥을 던지다가
저 멀리 남이 봤을까 봐 반나절이나 부끄럽네

슬픈 허난설헌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집 뒤의 솔밭으로 갔다. 시원하게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소나무들이 이 세상의 안타까운 여성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려는 듯 빼곡하게 서 있었다.
  
▲ 허난설헌 생가에서 설명 중인 관광해설사  25일, 강릉 문화해설사가 허난설헌 생가에서 일행들에게 허난설헌의 작품과 일생을 해설하고 있다.
ⓒ 김은진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재능을 펼치기 힘들었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예술 작품을 남긴 두 여인의 생가를 보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강릉의 또 다른 명소인 강문해변으로 향했다. 강문해변에 도착하니 시원한 파도 소리가 환영의 박수 소리처럼 들렸다.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잠시 양말을 벗고 거닐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게 쳤지만 하늘을 파랗고 맑았다.
바라보는 이의 숨이 멎을 듯 하늘은 바다를 높이 당겨 움켜쥐었다. 그리고 밀듯이 내려놓으니 새하얀 포말이 모래사장으로 밀려왔다 밀려났다. 혹시 나에게 닿을 수도, 때로는 지금보다 멀어질 수도, 어쩌면 나를 휩쓸고 갈 인생의 파도는 끊임없이 아름답게 철썩였다. 
 
▲ 강문해변 25일 강릉커피로 유명한 강문해변의 파도
ⓒ 김은진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작가의 브런치에 실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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