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가족 같은 회사

2024. 4. 27. 00:3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 이혼할 거야.” 언니가 폭탄선언을 했지만 우리 가족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백수가 체질인 형부는 남편감으로 빵점이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원한 일이었음에도 언니는 심각한 이혼 후유증을 앓았다.

그러나 시간보다 더 좋은 약은 없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지금 언니는 잘 먹고 잘 산다. 다니엘 헤니를 닮은 남자와 연애도 하고 웨이트트레이닝에 수영에 심지어 폴댄스까지 섭렵하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언니가 도대체 뭐 하는 여자인지 궁금해하곤 한다. 한번은 수영장 아주머니들이 결혼은 했냐고 묻기에 이혼했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더니 한 분이 나지막이 귓속말을 했단다. “부럽다!”

많은 기혼자가 이혼을 꿈꾼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별은 사별밖에 없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러저러한 상황에 발목이 잡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는 함께 살고 싶지 않지만 따로 살 이유가 딱히 없어서, 또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참는 사람도 보았다. 집값이 폭락해 재산 분할 시 큰 손해를 볼 수 있으므로 반등을 기다리며 참는 사람도 보았다.

사실, 이러한 이유야 돌파구를 찾으면 그만일 테다. 그러나 아이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연년생 남매를 키우는 내 친척 동생 역시, 이혼하고 싶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결국은 아이들 때문에 마음을 접었다. 편부모 가정에서 자란 제 삶을 아이들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까닭에서였다.

이런 동생의 낙은 우리 집에 놀러 와 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 것이다. 상차림이 변변치 않아도 동생은 게걸스레 밥그릇을 비운다. 꿀맛과도 같은 남편 험담을 반찬으로 삼기 때문이다. 동생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차마 글로 받아적을 수 없는 수준이다.

그래도 살 맞대고 사는 사람한테 너무 심한 말 하는 거 아니냐고 내가 핀잔을 놓으면 동생은 나름의 항변을 한다. “나도 예전에는 아줌마들이 남편 욕하는 거 이해 안 갔거든? 근데 내가 아줌마가 돼 보니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스트레스를 풀 수가 없어. 언니, 이건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야.” 그렇다면 이 언니가 듣고만 있을 수는 없지. 나는 “진짜?” “어머!” “미친 거 아냐?” 격렬하게 맞장구를 치며 동생의 가정 유지에 이바지하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한풀이를 하던 동생이 돌연 이상 행동을 보였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거친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손으로는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동생은 당신을 헐뜯고 있다는 얘기를 제외한 모든 상황을 남편에게 보고했다. 지금 어디에서 누구랑 무얼 먹고 있으며 아이들 하원은 이때쯤 시킬 테니 걱정 말라고 말이다.

여태껏 복에 겨운 투정을 한 거냐며, 결혼 못 한 노처녀를 놀리는 거냐며, 역성을 들어준 내가 도대체 뭐가 되냐며 툴툴거리자 동생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참, 이 언니 또 모르는 소리 하네. 난 지금 가족이라는 회사를 운영하는 거야.”

이어지는 동생의 말은 이러했다. 가정을 원활하게 굴리기 위해서는 육아, 집안일, 경제활동은 물론 자질구레한 잡일 오만 가지를 해내야 한다. 이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할 수는 없으므로 남편과의 적절한 분배가 필요하다. 나는 이혼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후 나를 사장으로, 남편을 직원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릇 사장이라면 직원이 회사생활에 만족할 수 있도록 관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동생은 내키지 않아도 이렇게 메시지도 보내고, 직원 복지를 위해 주말에는 함께 여행도 다닌단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함께 일구어 나갈 동반자와 해야 하는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동생은 시계를 흘끔 보더니 무거운 몸을 애써 일으켰다. 집밥을 좋아하는 남편에게 저녁으로 김밥을 싸주기로 약속했단다. 우리 집 냉장고를 거덜 내 놓고도 김밥이 들어갈 구석이 있느냐는 물음에 동생이 대답했다.

“나는 배불러도 직원 식사는 챙겨야 할 거 아니야. 굶기고 일 시키면 불만이 생기겠어, 안 생기겠어?” 나는 그런 동생을 의전하는 셈치고 정류장까지 배웅했다. 기사 딸린 대형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동생 모습이 제법 사장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내 동생은 언제 퇴근해서 언제 마음 편히 쉬려나. 회사 중에 가족 같은 회사가 제일 힘들다더니만 그 말이 참말이지 싶다.

이주윤 작가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