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성 진격 결정... 혁명이 지속돼야만 했던 이유

이영천 2024. 4. 2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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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의 승리 그 뒤... 잘 훈련된 중앙군 격파한 장성 황룡강 전투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황토현 전투는 상대적으로 약한 지방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다. 하지만 홍계훈 부대는 중앙의 정규군으로, 한양을 지키는 잘 훈련된 조선의 핵심 전력이다. 거기에 최신 대포와 양총 등 화력도 뛰어나다. 결코 얕볼 상대가 아니다.
 
▲ 황룡강 전투 기념탑 전남 장성 황룡강에서 벌어진, 동학혁명군이 홍계훈 부대를 격파한 전투를 기념하고 있다.
ⓒ 이영천
 
황토현 전투 승리로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고는 하나, 혁명군이 이들을 맞아 얼마나 난감했을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선 화력이 절대적으로 열세다. 군사도 훈련은 물론 전투 경험이 부족한 농민이 대부분이다. 야습은 황토현에서 이미 드러난 전술이다. 객관적 여건상, 전투가 벌어진다면 승리를 장담하기가 쉽지 않다.
빠른 행군으로 홍계훈을 따돌리고 전주성을 선제공격하는 방법이 있다. 이 역시 한바탕 전투는 불가피하다. 어디서건 전투를 치러야 한다면, 길목을 막고 매복과 기습으로 선제적 타격을 가하는 게 유리한 방법이다.
 
▲ 장성 갈재 전라남북을 가르는 경계인 험준한 갈재.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1차봉기에서 피아간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 이영천
 
남도에서 전주로 가장 빨리 가려면 장성 북쪽 갈재를 넘어야 한다. 이처럼 갈재는 혁명군이나 홍계훈 모두에게 절대적 요충지다. 갈재 험준한 지형을 활용, 매복과 기습작전을 펼친다면 승리 가능성은 커진다. 따라서 무조건 갈재를 선점해야 한다. 그러려면 빨리 장성을 수중에 넣어야 한다.

군사 대부분이 농민인 혁명군에겐, 시시각각 다가오는 농사철도 큰 부담이다. 가급 농사철에 이르기 전, 무엇이건 성과를 거둬야만 하는 처지로 내몰린다.

남도를 휩쓸고

지원군 파병 소식을 들은 홍계훈이 18일에서야 움직이기 시작한다. 전주성을 나와 남쪽으로 길을 잡는다. 홍계훈의 행로는 지원군이 당도할 예정지인 영광 법성포다.
 
▲ 법성포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는, 조선시대 세곡선 및 군함이 이용하던 주요 항구였다.
ⓒ 이영천
 
4월 21일 법성포에 도착한 홍계훈은 포구를 지키는 병력을 남기고, 다음날 영광 관아에 진을 친다. 함평에 있는 혁명군 소식은, 그곳 현감이 염탐하여 수시로 홍계훈에게 보고한다. 피아간 치열한 첩보전이 전개되는 양상이다.
홍계훈의 움직임에 의견이 엇갈렸을 것이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 길목을 막고 싸우자는 측과 화력이 열악하니 대규모 병력을 꾸린 후 싸우자는 의견이 맞섰을 개연성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건 전투에 맞닥뜨린다는 건 필연으로 보였다. 어차피 벌어질 싸움이라면 유리한 여건에서 싸우는 게 상책이다.
 
이때 동학군의 뒤를 쫓던 관병들은 고부, 흥덕, 무장 등 여러 고을을 거쳐 영광군 근처까지 따랐으나 동학군이 거리를 두고 앞서가며 만나는 성(城)마다 함락시키고, 무기 등을 거둬 잡힐 듯 말 듯 앞서 남으로 남으로 무안, 영암, 강진에 이르기까지 조선 남쪽 끝까지 쫓기어 내려갔다.

관병이 오면 동학군이 가고 동학군이 가면 관병이 쫓아가기를 여러 날, 그렇게 이동한 거리가 어느덧 고부로부터 합계 수백 리나 되었다. 그 먼 길을 내려가는 동안 동학군은 이모저모로 몇십 명씩 몇백 명씩 흔적 없이 빠져나와 그 종적을 감추었으므로 쫓아가던 관병들은 동학군의 향방을 자못 알 수 없었다. (동학사. 오지영. 문석각. 1973. p216 의역 인용)
 
혁명군 전술은 매복과 기습뿐이다. 한판 전투를 벌일 요량으로 은밀히 북쪽으로 진군한다. 불갑산을 지나 장성 황룡강 가에 닿는다. 험준한 갈재 지형을 활용, 한바탕 전투를 벌일 작정이다. 그다음 곧장 전주로 진격한다는 구상이다.
 
▲ 황룡강 전투 기념탑 황룡강 전투 기념비 부분으로 장태를 굴리며 싸우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 이영천
 
장성에 도착한 혁명군은 읍 남서쪽 황룡강 가에 간격을 두고 진을 친다. 본진을 중심으로 위아래로 정연하게 자리한 모습이 제법 군대다웠다.

아울러 장흥 이방언 장군의 제안으로 대나무를 엮은 장태 수십 개를 만들어 두었다. 본래 닭 키우는 장태를, 사람 키보다 크게 만들어 안에 짚을 단단히 채워 총탄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전투가 벌어지면 지형을 이용해 이를 굴리며 싸울 요량이다.

혁명군 진로를 탐색한 홍계훈이 이학승을 지휘관 삼아 4백여 병력에 대포와 기관총을 딸려 장성으로 보낸다. 공격보다는 단지 영광으로 넘어오는 길목만 방어하도록 명령한다. 그 사이 홍계훈은 법성포에 배를 징발해 둔다. 만일 궤멸적인 타격을 입는다면 한양으로 도주할 요량이다.

황룡강 전투, 관군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다

장성은 갈재를 넘어 맞는 남도 첫 고을로, 방장산과 입암산에 등을 기댔다. 분지형 지형에 노령에서 발원한 황룡강이 고을 가운데를 남북으로 휘감아 흐른다.
 
▲ 황룡강 장성을 가르는 황룡강. 사진 왼편이 월평리이고 오른쪽 먼 곳이 신촌마을이다.
ⓒ 이영천
 
전투가 벌어진 월평리와 신촌마을은 장성읍 서남쪽의 황룡강 양편에서 약 1km 거리를 두고 앉아있다. 이학승이 진을 친 신촌마을을 누운 황소 형상이어서 '구유 혹은 구시등'이라고 불렀다. 기념탑이 서 있는 마을 뒤 까치골은, 소가 쟁기질하면 뒤집히는 까치밥을 쫓아 까치가 날아온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점심때가 되어 이학승 부대가 읍내가 보이는 고개에 도착한다. 홍계훈 부대가 영광에 있다고 생각한 혁명군은, 느슨한 경계에 황룡강 가 월평리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를 본 이학승이 황룡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신촌마을로 이동, 편대를 나누어서 진을 친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있는 혁명군을 향해 대포로 공격을 가한다. 혼비백산하는 와중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다. 이학승은 혁명군을 완전히 얕잡아 봤다. 당황한 혁명군이 곧 진용을 갖추어 반격해 온다.
 
▲ 장태 황룡강 전투에서 사용한 장태의 사례. 닭을 기르던 도구였다.
ⓒ 이영천
 
관군보다 높은 곳에 올라, 장태 수십 개를 아래로 굴리며 공격해온다. 기관총과 양총만 믿고 있던 관군은 장태를 방패 삼아 공격해오는 혁명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만다.
지형지물을 활용한 혁명군의 진격에 우세한 화력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한다. 거리가 가까워져 백병전이 붙자 숫자가 많은 혁명군이 절대 유리해진다. 전투는 혁명군의 대승으로 끝난다.
 
이때 동학군들은 관군을 유인하여 전라도 남쪽 끝단 먼 곳까지 끌고 내려가며, 한편으론 사잇길로 빠져나와 전주성으로 향하여 오던 차, 장성 근처에서 돌연 관군을 만나 대격돌을 하여 승첩하였다. 동학군 영솔장 오하영, 이방언 등이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영광읍으로부터 좁은 길로 빠져 장성 부근에 당도하자 돌연 산 북쪽 길에서 홍계훈의 후군 한 부대를 만나 싸우게 되었다.

이 부대는 원래 고부로부터 왼편의 길로 들어 장성 북쪽 갈재를 넘어 동학군의 앞길을 막고자 내려오던 차 장성 황룡강 가에서 양군이 서로 접전하게 되었다. 동학군 중에서 미리 준비하였던 대나무로 만든 장태 수십 대를 산지 정상으로부터 내리굴리며 관군을 사격함으로 관군은 미처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사살당하여 홍계훈 진영 지휘관 이교응, 배근환 2명과 관병 일백여 명을 몰살시키고 대포 3문과 양총 백여 개를 빼앗았다. (앞의 책. p217 의역 인용)
 
▲ 이학승 순의비 황룡강 전투 기념탑 인근에 세워져 있는,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이학승을 기리는 순의비.
ⓒ 이영천
   
이학승이 전사하고 400여 명 중 수십 명만 살아서 영광으로 도망하였다. 황룡강 전투 승리로 혁명군은 전리품으로 대포와 기관총, 백여 정 이상의 양총을 챙겨 전력을 보강하게 된다.

전주를 향하여 가기로 결정하다

여러 논의가 있었을 것이나, 황룡강 전투에서 승리한 혁명군 진로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바쁜 농사철이 시시각각 다가왔으나, 고부 봉기 해산에서 얻은 뼈아픈 교훈이 반면교사다.

여세를 몰아 영광에서 생쥐처럼 웅크린 홍계훈을 공격하자는 주장도 비등했을 터이다. 하지만 황헌주가 끌고 온 증원군이 황룡강 전투 중이던 23일 법성포에 도착, 관군 전력이 보강된 상태다.
 
▲ 신촌마을 신촌마을에서 바라 본 황룡강 전투 기념탑.
ⓒ 이영천
 
이제부터 속도전이다. 한양이 위협을 느낄 만큼 상징적이며 구체적인 성과를 내보일 기회다. 그래야 혁명 열기를 이어갈 수 있다. 결국 혁명이 지속되어야만 다중의 마음이 한데 뭉친다.

연이은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하나, 이것으로 조정이 흔들릴 개연성은 낮다. 그들의 면면으로 보아 나라를 팔아먹을망정 자신들의 권력과 이권을 결코 쉽게 내어줄 족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전주성을 점령해야만 한다. 그다음 홍계훈 군을 패퇴시키고, 그길로 바로 한양으로 진군이다. 그러니 무엇보다 속도가 생명이다. 동학혁명군의 의도대로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체되면 왕후 민씨는 분명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일 것이다.

왕후를 비롯한 여흥 민씨 척당이 임오군란 등 위기 때마다 보여준 모습이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자기 백성을 죽이려 들게 뻔하다.
 
▲ 정읍 일원 갈재 정상에서 바라 본 정읍 일원. 입암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와 KTX철도 노선이 보인다. 동학혁명군이 이 길을 따라 전주로 향했다.
ⓒ 이영천
 
전봉준은 전주성으로 진격을 결정한다. 젊고 날랜 군사로 선발대를 구성한다. 전 부대의 행군 속도를 높여 갈재를 넘었다. 가급적 빠르게 가야 한다. 전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한다. 정읍을 거쳐 태인, 원평을 지나 삼천에서 전주성으로 들어야 한다.

지금의 호남고속도로가 지나는 길이다. 팔뚝엔 힘이 솟고, 눈에선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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