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시간이 노동의 척도?… 낡은 생각서 깨어나라

김남중 2024. 4. 26.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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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진짜 노동
데니스 뇌르마르크 지음, 손화수 옮김
자음과모음, 468쪽, 2만2000원
‘가짜 노동’이란 용어를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책 ‘가짜 노동’을 철학자 아네르스 포그 옌셴과 함께 쓴 덴마크 인류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 뇌르마르크는 ‘가짜 노동’ 후속작인 자신의 새 책 ‘진짜 노동’이 한국에서 출간된 것을 계기로 오는 6월 30일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강연할 예정이다. 자음과모음 제공


기술의 발달이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킬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다. 하지만 로봇과 인공지능이 대거 적용된 이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일에 눌린 채 살아간다. 효율성 향상과 자동화가 계속되는데도 근무시간은 왜 줄지 않을까?

덴마크 인류학자이자 컨설턴트인 데니스 뇌르마르크(46)는 지난 2018년에 철학자 아네르스 포그 옌셴과 함께 쓴 책 ‘가짜 노동’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흥미로운 답을 제출했다. 직원들을 매우 바쁘게 만들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실속도 없는 업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책은 현대 노동 문화의 정곡을 찔렀다는 평과 함께 ‘가짜 노동’이라는 용어를 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지난해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뇌르마르크의 단독 저서인 ‘진짜 노동’은 ‘가짜 노동’의 후속작이다. 전작이 가짜 노동의 고발에 치중했다면, 이번에 나온 ‘진짜 노동’은 가짜 노동의 해결에 집중한다.

저자는 먼저 오직 시간으로만 작업을 평가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가짜 노동을 많이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기업이 직원들이 창출한 가치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그 일을 하는 데 투자한 시간에 비용을 지불하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일을 19세기와 20세기의 노동 형태에 정신적, 조직적으로 끼워 맞추었다는 사실을 돌아봐야 한다.”

그는 OECD 국가 대상 근무시간과 생산성의 관계를 조사한 자료를 제시하며 “가장 적은 시간 동안 일하는 곳에서 근무시간당 생산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근무시간을 늘리는 것으로 생산성을 높이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강조한다.

근무시간을 중심에 둔 노동 문화가 유지되는 속에서 직원들은 그 근무시간을 채우기 위해 상당한 분량의 무의미하고 부정직한 가짜 노동을 수행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직장과 일에 드리워진 가짜 노동의 그물을 걷어내는 방법을 제시한다.

가짜 노동은 대개 그럴듯하지만 모호한 헛소리들로 구성돼 있다. 가짜 노동을 구성하는 헛소리로 의심해야 할 전형적인 단어들도 있다. ‘시너지’ ‘비전’ ‘전략’ ‘변화’ ‘커뮤니케이션’ ‘컨설팅’ ‘HR(인적자원)’ 같은 것들이다. 그는 ‘전략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비전 선언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헛소리를 걷어내고 정직하고 실질적인 언어로 일을 다시 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변화 강박이나 트렌드 추종, 프로젝트 문화 등도 실제론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하는 가짜 노동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저자는 “변화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면서 “단지 시대의 흐름을 따른다고 해서 탈바꿈이라 할 수도 없으며, 반드시 이를 목표로 삼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비판한다.

디지털화가 실제론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면서 디지털과 신기술에 대한 집착을 가짜 노동의 한 요인으로 분석한 대목은 특히 날카롭다. 영국의 세금 징수 기관에서는 1970년대에 4대의 컴퓨터를 사용했지만, 2000년에는 컴퓨터 수가 10만 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관련 행정 직원 수는 줄지 않았고, 다른 공공부문과 동일한 성장률을 보였다. 저자는 디지털 기술이 말하는 잠재력에 대해서 “그 잠재력은 얼마나 확실하며, 언제 발생할 수 있으며,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이 복잡해지고, 조직이 관료화되고, 현장과 경영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일의 진짜 목적은 잊히고 있다. 문서, 회의, 보고, 평가 등을 중심으로 관리가 고도화했지만 지금의 경영자나 관리자는 예전만큼도 현장을 모른다. 성과 측정과 평가 프로세스는 대체로 비효율적이고 시간 낭비다. 데이터에는 가짜 노동, 거짓말, 조작 등이 섞여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의 일을 규정해온 경제·경영 이론이 상당수 헛소리일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며 일의 의미에 다시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또 관리자들은 직원들에게 더 많은 자율권을 주고, 쓴소리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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