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청만 하면 '신분증 남녀' 바꾼다…성별등록 자기결정법 유럽서 확산

백일현 2024. 4. 26.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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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의 연방의회 건물 밖에서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을 요구하는 시위자들이 깃발을 들고 있다. 이날 독일 의원들은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논바이너리가 공식 기록에서 자신의 성별을 더 쉽게 바꿀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승인했다. AP=연합뉴스


독일·스웨덴·스페인 등 유럽 각국에서 성별을 쉽게 바꿀 수 있게 하는 법안 제정이 확산되고 있다. 트랜스젠더 등의 인권에 긍정적이란 평가와 ‘성별 사기’ 등에 대한 우려가 엇갈리고 있다.


EU “연령 제한 없는 성별 인정 지지”


독일 연방의회는 지난 12일 성별등록 자기결정법 제정안을 가결했다. 이에 따라 오는 11월부터 만 18세 이상은 ‘남성’·‘여성’·‘다양’(divers)·‘기재 안 함’ 중 하나를 택해 등기소에 신고하면 성별을 바꿀 수 있다. 현재는 법적인 성별 전환에 정신과 의사 2명의 심리감정과 법원 결정문이 필요했지만, 트랜스젠더 등 당사자에게 굴욕감을 준다는 비판에 따라 바꿨다. 만 14~18세는 부모 또는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 본인이 신고한다.

지난 17일 스웨덴은 법적 성별 변경 가능 연령을 기존 18세에서 16세로 낮추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내년 7월부터 ‘성별 위화감(gender dysphoria·태어날 때 부여된 성별이 자신의 성별이 아니라고 느끼는 경우)’ 진단서 없이 성별 변경 신청을 할 수 있다. 18세 미만은 보호자, 의사, 국립보건복지위원회 승인은 필요하다. 스페인도 16세 이상이면 의료 전문가 평가 없이 법적 성별을 변경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을 지난해 2월 가결했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에 따르면 벨기에, 덴마크,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몰타, 노르웨이, 포르투갈 등도 자기 선언을 기반으로 한 간단한 법적 성별 인정 절차를 제공하고 있다. HRW는 “이런 움직임은 국제 의학적 합의와 인권 기준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앞서 트랜스젠더를 질병 분류에서 뺀 바 있다. 유럽연합(EU)의 ‘LGBTIQ 평등 전략 2020-2025’는 회원국 인권 기준으로 “자기 결정에 기초하고 연령 제한 없이 접근 가능한 법적 성별 인정”을 지지하고 있다.

신재민 기자

“여성 혐오적인 법” 비판도


법안이 통과된 국가에서도 여론은 갈린다. 독일 현지 매체 여론조사에서 관련 법안에 대한 찬성과 반대 비율은 각각 46%, 41%로 팽팽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우리는 트랜스젠더, ‘인터섹스’(남성·여성으로 구분할 수 없는 간성), ‘논바이너리’(한쪽 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규정하는 사람)를 존중한다”고 했다.

반면 보수 성향 기독민주당(CDU)의 마레이케 울프 의원은 “미성년자들이 적절한 상담 없이는 나중에 후회할 길을 선택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좌파 성향인 자라 바겐크네히트 의원도 “남성이 단순한 언어 행위로 자신이 여성이라고 선언할 수 있다면 여성의 안전한 공간은 곧 과거의 일이 될 것이다. (해당 법은) 여성 혐오적인 법”이라고 비판했다.

스웨덴에서도 최근 여론조사 결과 관련 법 반대가 60%, 지지가 22%로 나타났다. 스웨덴 의원들은 6시간 동안 토론을 벌였다. 일단 “국민 대다수는 법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치 못 채겠지만, 다수 트랜스젠더에게 새 법은 변화를 가져온다”(요한 훌트버그 의원) 같은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스페인도 찬반양론이 뜨거웠다. 이레네 몬테로 평등부 장관은 “트랜스젠더는 아픈 사람이 아니다. 이 법은 모든 사람이 수치심 없이, 차별 없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성향의 페미니스트 연합인 페미니스타스 소셜리스타스는 성명을 통해 “다른 나라에서 폐지되고 있는 법을 소수의 의지에 의해 시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지난 17일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의회에서 의원들이 새로운 성 정체성 법에 대한 투표를 하고 있다. 스웨덴 의회는 법적으로 성별을 바꿀 수 있는 연령을 18세에서 16세로 낮추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8세 미만인 경우에는 여전히 보호자, 의사, 국립보건복지위원회의 승인은 필요하다. 울프 크리스테르손 총리 정부는 이 문제를 놓고 분열됐다. AP=연합뉴스


일부 국가에선 악용 가능성도 제기된다. 지난달 르몽드의 보도에 따르면 일부 스페인 남성들이 “실용적인 이유로 성별을 바꾸고 싶다”는 뜻을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더 쉽게 소방관, 경찰관이 되려고 여성의 경쟁시험에 응하고 싶다”, “자녀 양육권을 얻을 가능성을 높이고 싶다”, “성폭력 신고를 피하고 싶다”면서다.

청소년 사이에서 ‘성별 위화감’ 진단이 늘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1972년 세계 최초로 법적 성전환을 승인했던 스웨덴에선 13~17세 여성의 성별 위화감 진단이 2008~2018년 사이 1500% 늘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영국에선 2023년 말 기준 약 5800명의 어린이가 성전환 호르몬 치료를 원하는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다.

지난해 7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트랜스젠더 아동 및 청소년 가족 협회 회원들이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헝가리·러시아는 ‘금지법’ 제정도


법 제정 전으로 돌리려는 움직임도 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스페인 마드리드 의회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보호를 철회하라는 보수 성향 인민당(PP)의 제안을 지난해 12월 통과시켰다.
지난해 12월 스페인 마드리드 지역 의회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보호를 철회하는 제안을 통과시키려는 투표에서 LGBTQ+ 활동가들이 '피 묻은 손'이라는 뜻으로 빨간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정부는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의 법 시행을 막아섰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16세 이상이면 자기 선언을 통해 법적 성별을 변경하도록 허용하는 법안을 2022년 12월 가결했다. 그러나 지난해 1월 영국 정부가 “영국 전역에 적용되는 평등법을 위반한다”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성별 변경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국가도 나오고 있다. 극우 성향으로 유명한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집권 중인 헝가리는 2020년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 변경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지난해 러시아 의회도 문서와 공적 기록에서 성별을 바꾸는 것은 물론 관련 의료 행위 일체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지난해 7월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의회 하원인 국가두마에서 의원들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의원들은 이날 성별 확인 절차를 불법화하고, 성별을 전환한 결혼을 무효화하며, 트랜스젠더가 위탁부모나 입양부모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강화된 법안을 통과시켰다. AP=연합뉴스


가디언은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국가에서 성전환에 대한 관용이 오랫동안 높았지만, 이 문제로 정당들도 내부 분열로 찢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유럽 보건 관계자들은 최근 수년간 청소년들의 성호르몬 치료 수요가 급증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백일현 기자 baek.il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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