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보랏빛 서리태꽃이 필 때까지

2024. 4. 26.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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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지인들에게 서리태를 주었다.

아버지는 서리태를 '속청'이라고 불렀다.

서리태는 껍질은 검지만 속은 푸르러서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이제 남은 서리태는 한 되 남짓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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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


가끔 지인들에게 서리태를 주었다. 딱 세끼 정도 밥을 지어 먹을 정도로 적은 양이라서 농담 삼아 ‘삼시 세끼 콩주머니’라고 불렀다. 삼베주머니에 콩을 넣어 주면 지인들은 앙증맞다며 좋아했다. 어릴 적 운동회 때 콩주머니를 던져 박을 터뜨렸던 놀이도 생각난다고 했다. 그 콩은 아버지가 직접 농사지은 것인데, 식구끼리 단출하게 먹을 요량으로 농약을 치지 않았다. 그래서 크기도 잘고 낱알도 고르지 않지만, 맛은 진하고 구수했다.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한 되 남짓 남은 것은 싱크대 아래 두었다.

그렇게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퍼뜩 생각이 나서 싱크대 아래 콩자루를 열어 보았다. 놀랍게도 콩 싹이 났다. 어쩌다 싹이 텄는지 유추해 보다가 얼마 전 정수기가 고장 나서 물이 새는 바람에 골머리를 앓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물이 스며들었는지 콩자루 가장자리가 축축했고, 바닥에 손을 뻗어보니 뜨뜻했다. 싱크대 아래, 어둠 속에서 조용히 콩 싹을 틔운 것을 생각하니 애틋하고 대견했다. 어쩐지 아버지가 대신 전해준 그리운 마음인 것만 같았다. 나는 콩 싹을 꺼낸 뒤 화분에 살살 옮겨 심었다. 며칠 지나자 음표 모양의 떡잎이 엄지만큼 올라왔다. 행여나 고양이가 앞발로 건드리기라도 하면 줄기가 부러질세라, 지지대를 세우고 실로 느슨하게 묶어주었다. 연약한 줄기가 비실비실 지지대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서리태를 ‘속청’이라고 불렀다. 서리태는 껍질은 검지만 속은 푸르러서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막내딸에게 보낼 생각으로 새벽부터 일어나 콩을 골랐을 아버지를 떠올리니 이내 코가 시큰해졌다. 이제 남은 서리태는 한 되 남짓뿐이다. 작년 여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더 이상 아버지가 수확한 서리태를 맛볼 수 없다. 이 서리태는 유품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여름이 오면 나도 아버지처럼 보랏빛 서리태꽃을 피워보리라.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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