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부터 광주까지, 비엔날레 이제 달라질 때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2024. 4. 26.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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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외국 관람객들이 월전 장우성의 1943년 수묵채색화 ‘화실’과 이쾌대의 1940년대 유화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난 20일 개막한 세계 최대 미술축제 베니스비엔날레(비엔날레 디 베네치아) 본 전시에서였다. 장우성과 이쾌대의 그림은 다양한 비서구 화가들의 20세기 초반 초상화 100여 점을 한데 모은 ‘초상화’ 섹션에 있었다. 그 많은 그림 중에서 장우성과 이쾌대의 그림 앞에 발걸음을 멈추는 이들이 유독 많았다. 폰을 들어 사진을 찍고 그림 속의 한복을 가리키며 “코레아…”라고 대화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 또한 K컬처의 세계적 유행의 여파가 아닌가 싶었다.

「 베니스비엔날레의 월전·이쾌대
‘제3세계’ 벗어난 한국 상기시켜
식상한 서구의 ‘비서구’ 담론에
‘변종’ 한국이 대안 제시 가능

그런데 이것을 바라보는 한국인 일행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와, 장우성과 이쾌대 그림이 인기 많네”하고 반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데 ‘제3세계’ 작품들의 일부분으로서 섞여 있는 게 뭔가 기분 좋지 않네”라는 이들도 있었다.

‘외국인’을 주제로 한 베니스비엔날레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본 전시중 ‘역사 핵심-초상화’ 섹션에 나온 장우성과 이쾌대의 작품. 문소영 기자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본 전시의 주제는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외국인’은 문자 그대로 타국인 혹은 이주민, 난민 등을 가리키기도 하고, 상징적인 의미의 이방인, 즉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는 성 소수자 및 서구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토착민 등을 아우르기도 한다. 장우성과 이쾌대 그림이 있는 ‘초상화’ 섹션은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예술가들이 서구 모더니즘을 접한 상황에서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수많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한 초상화를 재조명한다”는 취지다.

‘글로벌 사우스’는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의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을 아우르는 말이다. UN 기준에 따르면 한국은 선진국이기에 여기에서 공식적으로 제외된다. 베니스비엔날레 총감독 아드리아노 페드로사도 이를 의식했는지 “엄밀히 말하면 더는 글로벌 사우스에 속하지 않는 싱가포르와 한국의 작가들도 이 섹션에 포함되었는데, 이는 (장우성과 이쾌대 등의) 작가들이 작품을 창작할 당시에는 이른바 제3세계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공식 설명문에서 언급했다.

1940년대에 우리는 최빈국 식민지였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장우성과 이쾌대의 그림이 이 섹션에 걸려있는 것을 보는 기분은 묘하다. 우리가 과거 제3세계였다는 자각, 그러나 이제는 ‘선진국’이며 제3세계로 묶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런데 그런 식으로 다른 제3세계 나라들과 ‘구별 짓기’를 하는 태도가 올바른 것인가 하는 자문, 서구인의 주목을 받는 것에 대한 기쁨과 ‘우리는 기껏 명예 서양이 되고 싶은 것인가’ 하는 자괴감의 교차 등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 복잡한 마음은 한국인이 베니스비엔날레를 대하는 마음, 나아가 서구 진보 진영이 지배하는 국제 문화예술의 장을 대하는 마음일 것이다.

서구 예술계, 한국 다루기 어려워해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공식 병행 전시인 광주비엔날레 30주년 아카이브전 ‘마당-우리가 되는 곳’. [사진 광주비엔날레재단]

사실 한국인만큼이나 서구인, 특히 서구 진보진영이 한국을 대하는 마음도 복잡하다. 한국은 한때 제3세계였으나 더 이상 아니며, 서구화와 근대화로 인해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고, 그것으로 ‘이상하고 아름다운 혼종’ K컬처를 만든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베니스비엔날레 등 주요 국제미술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서구 진보진영의 담론인 ‘후기 식민주의, 토착문화 재조명, 서구인으로서의 원죄의식이 담긴 반(反)서구주의, 반(反) 자본주의 모더니티’에 뭔가 잘 들어맞지 않는 ‘변종’이다. 서구 문화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전파에 희생자가 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그렇다고 서구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서구 진보진영 학자와 예술가들은 한국을 다루기 껄끄러워하는 듯하다. 이는 이런 담론의 중심지인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에 기자가 유학하던 시절 체감한 것이다.

그렇다면 서구에 의해 쉽게 규정되지 않는 변종인 동시에 경제적·문화적 힘을 갖춘 한국이야말로 늘 비슷한 담론을 되풀이하고 있는 서구 문화예술의 장에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역시 ‘비서구와 소수자,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서구인 관점에서 본 비서구와 소수자’라는 담론의 반복이었다. 서구 남성 위주의 유명 작가들 대신 세계 방방곡곡의 미처 몰랐던 좋은 작가들을 발굴해서 보여준 것은 분명 성과였다. 그러나 담론이 식상해서 울림이 크지 않았다.

문제는 한국의 대표 비엔날레인 광주비엔날레 역시 담론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광주비엔날레는 올해 최초로 베니스비엔날레 일본관의 외국인 큐레이터가 된 이숙경 영국 휘트워스 뮤지엄 관장이 총감독을 맡았었다. 제1부는 현대의 모든 압박(정치권력부터 소수자에 대한 편견까지)에 대한 저항과 연대를, 제2부는 토착 문화에 기반을 둔 탈현대성을, 제3부는 후기 식민주의를 다뤘다. 올해 베니스비엔날레도 매우 비슷하지 않은가? 당시 이숙경 감독은 작가 소개에 국적 대신 그들이 태어난 지역과 지금 활동하는 지역을 넣어 그들의 초국가적이며 복합적인 정체성을 강조했다. 알려지지 않았던 매력적인 작가도 많이 발굴했다. 이러한 장점 또한 이번 베니스비엔날레가 이어받았다. 단점이나 장점이나 닮은꼴인 것이다.

새 담론 제시 못하는 비엔날레들

한국에서는 지자체마다 우후죽순 생기면서 관광용 지역 축제 정도로 오해되고 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비엔날레의 정신은 미술관 전시로는 힘든 대규모 국제전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담론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미술계에서는 이제 세계 비엔날레들이 담론을 이끌지 못하고 급변하는 현실에 뒤처지고 있다는 탄식과 비엔날레 무용론까지 나타나고 있다.

“베니스, 광주, 그밖에 주요 세계 미술제이 너무 크고 막연하고 비슷한 담론을 되풀이해온 게 사실입니다.”라고 박양우 광주비엔날레제단 대표도 말했다. 그는 베니스비엔날레의 공식 병행전시인 광주비엔날레 30주년 아카이브 전시 ‘마당-우리가 되는 곳’을 위해 베네치아를 방문 중이었다. 그는 덧붙였다. “그래서 올해 광주비엔날레 니콜라 부리오 예술감독에게도 그 점을 신경 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좀더 특화된 주제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래저래 달라질 길을 모색 중입니다.”.

‘변종’ 한국은 문화예술계에서 수십년째 되풀이되어 온 서구 진보 주도 담론을 넘어 새로운 담론을 제시할 역량이 있다. 그 발판이 한국의 비엔날레이길 희망한다.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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