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수의 카운터어택] 지지대 넘어서 축구장으로

장혜수 2024. 4. 26. 00:1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장혜수 콘텐트제작에디터

경기도 수원에서 안양으로 향하는 1번 국도 왼쪽에 비각이 하나 보인다. 비각이 있는 고개 이름은 지지대다. 조선 중기까지 이름은 사근현이었는데, 조선 정조를 거치면서 지지현(지지대)으로 바뀌었다. 사연이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화성 현륭원을 참배하고 환궁하던 정조는 고갯마루에 멈춰 현륭원을 바라봤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지 출발을 지체했다. 시도 지었는데, 중간에 ‘더디고 더딘 길에서 고개를 드니(矯首遲遲路)’라는 대목이 있다. ‘더딜 지(遲)’를 겹쳐 쓴 ‘지지’는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면서 썼던 말이기도 하다. 짠하다. 역사 공부는 여기까지.

지난 21일 ‘지지대 더비’에서 공중볼을 다투는 수원삼성의 김현(왼쪽)·툰가라(오른쪽)와 안양의 김정현. [사진 한국프로축구연맹]

축구 팬, 엄밀히는 나이 좀 있는 K리그 팬이라면, 정조나 공자 사연은 몰라도, 지지대라는 지명은 잘 안다. 안양 LG(FC서울 전신)가 2003년 말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기 전 수원삼성과 벌였던 라이벌전 이름이 ‘지지대 더비’였다. 두 팀의 연고 도시를 잇는 고개에서 따온 이 멋진 이름을 누가 붙였는지 알 수 없다. 사실 당시엔 이 이름이 아니라 그냥 ‘라이벌전’이었다. 재밌는 건 두 팀 서포터스는 상대를 라이벌로도 인정하지 않았고 미워했다는 점이다. 지나간 추억이 된 2005년 무렵부터 이 이름으로 불렸다. 아쉬움과 치열함이 오버랩되는 ‘지지대 더비’가 돌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계기는 수원삼성의 추락이다.

‘프로축구 수원삼성 2부리그 강등’. 지난해 12월 2일 이 소식을 접하고 눈을 의심했다. K리그1(1부) 최하위(12위) 수원삼성은 그날 시즌 최종전에서 11위 강원FC와 0-0으로 비겼다. 이겨야 승강 플레이오프에라도 비벼볼 수 있던 처지였다. 수원삼성은 K리그 팀 중 가장 많은 24개의 우승 트로피를 보유한 ‘최강’ ‘명가’다. 강등 확정 후 자기 팀을 향해 ‘나가 죽어라’ 노래를 부르던 수원삼성 서포터스, 붉어진 눈시울의 염기훈 감독 표정이 선하다. 1부를 떠나는 발걸음이야 얼마나 떨어지지 않았을까.

지난 21일 안양종합운동장에서 수원삼성과 안양FC의 K리그2 경기가 열렸다. 21년 만에 돌아온 ‘지지대 더비’는 기대가 컸다. 리그 1위(수원삼성)와 2위(안양) 간 대결이라 관심도 높았다. 원조 ‘지지대 더비’와 달리, 두 팀은 서로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 그래도 ‘지지대 더비’라는 그 자체가 서포터스의 아드레날린 수치를 높였다. 경기 전부터, 내내, 후에도 열기가 뜨거웠다. 수원삼성이 3-1로 이겼다. 이날 관중은 1만2323명으로, 2003년 안양 창단 이래 최다였다. 최근 K2리그 관중이 급증하면서 ‘수원삼성 강등 효과’라는 말이 돈다. 올해 K2리그 평균 관중 수는 4682명으로 지난해(2508명)의 약 2배다. 수원삼성 경기 평균 관중 수는 1만376명이다. 수원에서 열릴 두 번째 ‘지지대 더비’는 오는 8월 12일이다. 여름밤이 기다려진다.

장혜수 콘텐트제작에디터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