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실패 땐 가족 뒤 봐주게"…5·16 명단서 내 이름 뺐다

배노필 2024. 4. 2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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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추천! 더중플’은 ‘철강왕’ 박태준(1927~2011)의 이야기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23)’입니다.
박태준은 2004년 90회에 걸쳐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 자신의 회고록을 연재했습니다. 제철보국(製鐵報國·철을 만들어 나라에 보답한다)의 의지로 산업화 시대의 큰 획을 그은 박태준의 일대기를 더중플에서 디지털 에디션으로 복원합니다.

포스코(포항제철)를 일군 ‘철강왕’ 박태준의 일생은 ‘멈추지 않는 쇳물’처럼 이 나라 경제산업 건설에 모조리 바친 것이었다지만, “정치를 본업으로 할 생각이 없다”고 했던 그의 말과 달리 박태준의 ‘정치’는 결국 ‘외도’ 이상의 것이 됐다.

그는 정치 9단이라는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보다 역대 대통령들과 맺은 인연이 더 깊었다. 박태준은 연달아 5명의 대통령과 직접적 교류가 있었던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산업의 기반을 닦고 빈손으로 떠난 거인'. 박태준(1927~2011) 전 포항제철 명예회장이 2004년 생전에 남긴 회고록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를 더중플에서 디지털 에디션으로 복원한다. 중앙포토


박태준이 직접 겪은 ‘대통령 5명 인물평’

박태준과 5명의 대통령, 그들은 어떤 사이였나. 무엇보다 박태준은 3명의 대통령과 ‘사제지간’이었다.

1948년 박정희는 ‘교사’로서 육사 6기 ‘제자’ 박태준을 눈여겨보게 된다. 포병 탄도학 시간에 어려운 수학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그의 실력이 인상 깊었다. 그 인연은 훗날 5‧16 때 박정희가 거사 실패 시 가족의 안위를 박태준에게 당부할 만큼 깊은 신뢰로 뿌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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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실패 땐 가족 봐주게” 5·16 명단서 내 이름 뺐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4811

박정희 이후 두 명의 대통령은 사실 박태준의 제자 격이다. 1954년 그가 육사 교무처장 시절 육사 11기 전두환과 노태우는 4학년 생도였다. ‘스승(박정희)’의 정계 입문 권유도 마다했던 박태준은 ‘제자(전두환)’의 강권에 의해 1980년 신군부의 국보위에 참여한다. ‘강권’이란 의미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포항제철을 정치 외압에서 지켜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6공 시절엔 역시 ‘제자’ 노태우로부터 1990년 집권여당 대표에 임명된다.

이후 당권과 대권 투쟁에서 그는 YS와 격렬하게 대립한다. 그리고 YS 집권 기간 ‘정치적’ 장기외유를 떠나게 된다. 그가 1997년 드디어 본인의 의지로 정치에 복귀하게 된 건 순전히 YS와의 구원(舊怨) 때문이다. 이후 JP와 함께 자신의 정치적 이니셜(TJ)이 새겨진 ‘DJT 연합’으로 김대중 정권 탄생에 일조를 한다. 그리고 DJ 정권에서 JP에 이어 두 번째 국무총리를 맡았다.

‘외도’라고 하기엔 핵심적 ‘정치’인으로서 이 나라 최고권력자들을 누구보다도 많이 접했고, 진심이건 아니건 자신은 ‘정치 체질이 아니다’고 한 만큼 역대 대통령에 대한 ‘직설적’ 평가도 가능했던 드문 인물. 박태준이 직접 겪은 대통령 5명의 인물평을 소개한다.


괄괄했던 전두환의 ‘배려’

전두환·노태우 등 4년제 정규 육사 1기생(육사 11기)들은 교무처장이던 박태준을 ‘금시계’란 별명으로 불렀다. 박태준이 육군대학을 수석졸업하며 금시계를 받았기 때문이다. ‘생도’들에 대한 박태준의 회고.
“번갈아 국가 최고권력자가 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육사에서 나의 생도였지만 당시에는 깊은 인상을 남기지 않았다.”

최고권력자가 된 전두환은 1980년 가을 “박 선배님,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며 괄괄한 목소리로 박태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안사 안가(한강맨션)로 부른다. 긴장과 상념이 교차한 옛 제자이자 부하의 호출.
“맨션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뜻밖에 편안했다. 경호원조차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군 선배에 대한 배려로 느껴졌다.”

1987년 5월 7일 광양제철소 준공식에서 박태준 포철회장(오른쪽)이 전두환 대통령(가운데)을 안내하고 있다. 중앙포토


박태준은 전두환의 강권에 의해 국보위에 참여하고 민정당 의원도 된다. 두 사람은 한때 사돈관계를 맺기도 했다. 전두환에 대한 그의 평가.
“전씨의 경우 나를 정치에서 반 발쯤 물러나 있도록 배려해 줘 포철을 상처 없이 내 의지대로 끌고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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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배 포철만 돌볼 겁니까” 괄괄한 그 전화, 전두환이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8296


‘음성다중방송’ 노태우식 정치 화법

또 박태준의 ‘생도’가 대통령이 됐다. 노태우는 그에게 민정당 대표를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정계개편 이야기가 무성할 때였다. 내심 3당 합당에 반대하던 박태준이 그 점을 우려하자 노태우는 “아직 아무것도 된 게 없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태우는 이 말을 던진 당일(1990년 1월 5일) 박태준을 민정당 대표에 임명하고, 불과 보름여 뒤인 1월 22일 3당 합당을 발표한다.

1990년 1월 5일 노태우 대통령이 신임 박태준 민정당 대표위원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중앙포토


“나는 노 대통령에게 기분이 상했다. 일을 맡기고도 처음부터 허심탄회하게 나오지 않은 점이 내 방식에 안 맞았기 때문이었다.”
박태준은 노태우 정치 스타일을 당시 언론의 표현을 빌어 ‘음성다중방송’이라고 힐난한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노태우는 박태준에게 대선 경선 출마를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태준이 정작 경선에 나서려 하자 노태우는 큰일날 것처럼 반대했다고. 노태우와 인연은 결국 YS와 악연으로 이어졌다. 노태우에 대한 박태준의 평가다.
“노씨는 정치적 곤경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를 정치 전면에 배치하는 바람에 나와 포철에 씻기 힘든 깊은 상처를 안겨줬다.”


‘뗑깡, 독특한 민주주의’ 김영삼


1992년 10월 10일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오른쪽)이 광양제철소 영빈관을 방문한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왼쪽)과 어색한 모습으로 악수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정적이었던 김영삼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그(YS)가 부려대는 ‘뗑깡’도 보았다. (…) YS의 독특한 민주주의도 경험했다. 그는 이런 행태를 ‘정면돌파’라 불렀지만 내 성미엔 맞지 않았다.”

1997년 말 YS는 IMF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하기 직전 여야 대표와 대선후보들을 불러 협조를 구한다. YS에겐 치욕적인 자리다. 박태준은 DJT 연대의 일원이자 자민련 총재 자격으로 YS와 묘한 재회를 했다. 이 자리에서도 박태준이 본 YS 캐릭터는 두드러진다.

■ 1997년 11월 21일 청와대 회동

「 예상외로 YS는 당당해 보였다.
(박태준) “멀쩡하네.”
(김영삼) “그러면 죽은 줄 알았나.”


김대중은 끝까지 ‘도쿄 약속’을 지켰나

2000년 2월 22일 김대중 대통령이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태준 총리(오른쪽) 등 국무위원들과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박태준과 김종필은 ‘박정희의 사람’으로서 최대 정적 김대중과 손을 잡았다. 20세기 말 한국 정치사의 ‘극적인 화해’라고 할 수 있다.

박태준은 ‘DJT 연합’을 결심한 이유로 DJ와의 ‘도쿄 약속’을 든다. 일본에서 치른 월드컵 예선 한·일전에서 한국이 승리한 그날, 기분 좋은 분위기에서 박태준은 DJ에게 단도직입적으로 4가지 질문을 던진다. 예의를 갖췄지만, 저잣거리 말투로 핵심을 옮긴다면 “당신 거짓말쟁이 아니냐?” “빨갱이 아니냐”를 따져 물은 거였다. DJ의 솔직한 답에 마음을 연 박태준은 그를 도와 ‘민주주의를 진일보’ 시켰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는 훗날 이 회고록에서 DJ에게 되묻는다.
“DJ는 끝까지 도쿄 약속을 지켰는가? 끝까지 YS의 전철을 밟지 않았는가?
이에 대한 판단은 국민과 역사의 몫이다.”

「 ※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아래 기사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url을 주소창에 붙여 넣으세요.
▶“멀쩡하네”“죽은 줄 알았나” IMF 터진 후 YS 뜻밖의 모습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0021


참모들과 격의없이 토론 벌였던 박정희

1970년 4월 1일 박정희 대통령(가운데)이 포항제철소 착공식에 참석, 박태준 포철 사장(왼쪽), 김학렬 부총리(오른쪽)와 함께 발파 스위치를 누르고 있다. 중앙포토

박태준에게 박정희는 격이 다른 대통령이다. 제자(전두환·노태우)나 정적(김영삼), 혹은 정치 파트너(김대중)로 생각했던 다른 대통령들과 달리 그가 박정희를 ‘스승’으로서 처음 만났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박태준은 21세 청년이었던 1948년 늦은 봄날 10살 연상의 박정희 대위를 육사 생도로서 처음 만났다. 박정희의 첫 인상은 “눈매나 말씨가 남달랐다.”

6·25 전쟁을 치르면서도 한동안 두 사람의 직접적 교류는 없었다. 하지만 1960년 1월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산에 내려가는 박정희가 ‘제자’ 박태준을 찾아와 어깨를 ‘툭’ 쳤다.

“부산엔 말이야, 회도 많고 술도 많아. 같이 내려가지. 어때?”

박정희가 ‘툭’ 던진 한마디에 그는 당장 육본 요직을 때려치고 부산행을 택한다. 좋아하는 선배랑 생선회 안주에 술 마시며 놀자고 따라간 건 아닐 터. 박태준이 매료된 박정희의 마력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박정희는 ‘새로운 국가의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다.

5·16 이후 정부와 정치 외곽에서 박정희의 ‘무쇳덩이’가 된 박태준의 이야기가 계속 펼쳐진다. 그가 기억하는 박정희는 참모들과도 격의없이 토론을 벌였던 실용주의적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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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자네 무쇳덩어리야?” 술자리 버틴 박태준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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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노필 기자 bae.nop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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