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혜의 마음 읽기] 책 도구화의 어제와 오늘

2024. 4. 25. 00:1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러스트=김지윤]

시간은 모든 걸 변화시키고 타락시킨다. 고귀하게 태어난 책은 한때 사회 변혁과 시대 추동의 중심이었으나, 이제는 범속하고 타락한 매체가 되었다. 이런 현상은 책 만드는 이들에게 우울감을 안겨준다. 편집자들이 익명성 속에서도 자부심이나 소명의식을 잃지 않는 것은 오로지 책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어떤 고귀함 때문이다. 그것이 교환가치가 현격히 떨어지는 책에 수십 년을 바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세상은 이념보다는 관습과 버릇이, 촘촘한 사유보다는 활동과 취향이 더 활발히 지배하는 곳이다.

「 회고록 출판 집착한 아이히만
책이 총칼보다 무서울 수 있어
짜깁기 수준 책이 인문서 대접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혼란감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명령을 받아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는 일에 가담한 아돌프 아이히만은 책을 타락시킨 것으로도 이름이 거론될 만한 인물이다.

독일 나치의 아돌프 아이히만


전쟁이 끝난 후 아이히만은 연합국의 눈을 피해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다. 가명을 쓰고 과거를 지운 채 그는 그림자처럼 조용한 마을에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삼림 감시원으로 일하다가 나중엔 닭을 키우는 양계장 운영자가 되었다. 이웃들은 그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과거와 단절한 채 소박한 마음씨로 살았다면, 그는 여가 시간에 좋아하는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서 인생 후반부를 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길하게도 그에게는 글쓰기 욕구가 있었다. 나치 친위대원 시절 활발하게 추진했던 유대인 절멸 업무와는 너무나 다른, 철저히 주변부로 밀려난 자신의 익명성을 그는 점점 더 견디기 힘들었다. 이때 공허한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손쉬운 방편은 자신에 대해 직접 말하고, 자기 삶을 글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아이히만은 다시 과거를 호출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친나치적인 인물들과 접촉했고, 그중 빌럼 사선이란 인물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사선에게 끌린 이유는 그가 잡지 발행인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적이고 새로운 문체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독자를 사로잡을 줄 아는 그에게 기대어 아이히만은 자신도 저자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엿봤다. 1950년대에 아이히만은 주말마다 사선 그룹과 교유하며 전쟁 기간에 자신이 했던 일을 녹음했고, 이 파일들을 문서로도 정리했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감옥에 수감됐을 때도 아이히만은 필기도구를 요청해 끊임없이 글을 썼다. 악필로 써내려간 그 원고지들을 연결하면 총 250㎞에 달한다고 한다.

회고록 출판에 대해 아이히만이 얼마나 열렬한 욕망을 품었는지 살펴보자. “장정과 표지는 진줏빛 혹은 비둘기색 같은 단색으로 할 것. 제목은 가늘면서도 아름다운 글씨체로 맞출 것. 가명은 본질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용할 생각이 없음.” 그는 형 집행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표지 색깔, 편집, 서체, 본문 구성 하나하나에 신경 쓰면서 흥분 상태를 이어갔다. 그는 자기 정당화의 욕구를 넘어 스스로 역사를 집필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 자문했던 한 유대인 사상가의 말처럼, 누가 봐도 악일 뿐인 일에 대해서 아이히만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싶었다. 이렇듯 그는 후대의 해석권을 자신이 선점하려는 마지막 욕망을 품었다. 이런 그의 행적을 처음 알게 됐을 때 나는 책이 ‘인류 역사에 기여한 좋은 매체’라는 기존의 내 생각에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히만에게 책은 칼과 총 이상의 날카로운 무기였던 것이다.

[사진제공=전호성 객원기자]

책도 본질적으로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아이히만은 책의 매체적 성격에 충실했다. 그래서 악서(惡書)가 탄생한다. 유명세에 힘입어 혹은 시대적 조류 속에서 나쁜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책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이히만류의 책의 수단화가 더 이상 불가능해진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다른 의미에서 수단화한다. 그것은 책이라는 매체가 힘겹게 보존하고 있는 어떤 아우라에 기대어 돈을 버는 것을 의미한다.

가끔 인문서 트렌드를 짚어달라는 외부 매체의 요청을 받으면 당혹스럽다. 트렌드란 주도적 흐름을 뜻하기에 베스트셀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데, 인문서 베스트 목록에서 읽어본 책, 아는 저자 혹은 맥락이 잡히는 책이 드물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체 출판 지형도에서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정도라면 별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짜깁기 어록류에 불과한 책들이 인문학이라며 베스트셀러 목록을 일 년 내내 지배하면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온다. 과연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왜 출판을 하느냐는 질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출판인들은 점점 자극적으로 편집한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마케팅 중독, 긍정 중독, 리더십 중독 같은 것을 발견하면서 미열 같은 두통이 생긴다. 사람을 만나 어떤 책이 좋고 나쁘다는 가치 평가를 하기가 너무나 조심스러우며, 극도로 입조심을 하게 된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