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산책한 애들, 철학자 됐으면…선유도 공원 그리 태어났죠"

전수진 2024. 4. 24.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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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정다운 감독(오른쪽)과 김종신 제작자가 18일 오후 서울 선유도공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가운데는 이들의 영화 '땅에 쓰는 시'에도 등장하는 둘째 아들 단우(6) 군. 장진영 기자


서울 선유도공원의 개미는 통통하고 참새는 차분하다. 아름답되 요란하지 않고 자연이 자연스러운 이 공원에서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다. 지난 18일 찾아간 이 공원은 한국 조경의 역사를 썼다는 평가를 받는 정영선(83) 선생의 작품. 정수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한 뒤 방치된 이 곳을 정영선 조경가는 자연에 되돌려줬다.

이 곳에서 손님은 사람이다. 개미도 참새도 사람도 두루 행복한 곳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지난 17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부부, 정다운 감독과 김종신 프로듀서를 선유도 공원에서 만났다. 정 감독은 "(정영선) 선생님은 공공의 공간을 중시하는데, 그 공간을 산책했던 아이들이 자라 철학자가 되면 좋겠다고 늘 이야기한다"며 "차세대를 위한 선물을 하고 싶다는 의미에서 그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꼭 촬영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영선 조경가의 삶과 일을 다룬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 포스터. 부부인 정다운 감독과 김종신 PD의 작품이다. 영화사 진진


정 감독과 김 PD는 유하 감독의 영화 '결혼은 미친짓이다'(2002) 영화 제작진으로 처음 만났다. 이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정 감독은 케임브리지 대학원에서 건축 영상을, 김 PD는 런던 명문 골드스미스대에서 영상을 공부한 뒤 귀국했다. 이들은 '이타미 준의 바다'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 등 건축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지속가능성이 중요한 건 환경뿐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 대박'이 날 가능성이 크지 않은 건축 전문 다큐멘터리와 영상으로 두 아이를 길러내는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인 까닭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에 나오는 제주도 풍 박물관. 사진제공 영화사 진진

Q : 이번 다큐 계기는.
A : 정 감독="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갑자기 서울 강남으로 이사를 오게 됐다. 아파트 숲 사이 양재천에서 위로를 받으면서 공간과 시간에 예민한 아이로 컸다. 자연스레 건축과 조경에 관심을 갖게 됐다. 예술의전당에 있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선유도공원에서 아이가 뛰어놀며 생활했는데, 그 모든 공간에 정영선 선생님의 손길이 녹아있더라."
김 PD="건축은 잘 모르다가 관심을 갖게 됐는데, 그런만큼 좋은 집, 좋은 공원이 주는 힘을 실감하게 됐다. 다들 특히 주택 문제로 힘들어하는데, 그럴 수록 중요한 게 공공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많거나 적거나 무관하게, 아무나 와서 즐길 수 있는 장소. 그게 바로 우리 모두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공간의 힘을 전하고 싶었다. 이런 공간의 힘을 살려 다음 세대에 주고 싶다."

정다운 감독(오른쪽)과 김종신 PD. 서울 선유도공원 계단에 마주 앉았다. 장진영 기자
Q : 건축가 이타미 준(伊丹潤, 한국이름 유동룡)부터 조경가 정영선까지, 대가의 작품을 다뤘는데.
A : 정 감독="(정영선 조경가처럼) 어마어마한 여장부 선생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은 사실, 좋은 의미로 고통스럽다. 고통스럽지 않은 일은 사실 없지만, 존경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잘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공간을 내가 찍고 있다는 걸 문득 자각할 때, 행복을 느낀다."
김 PD="우연히 친구의 소개로 파주출판단지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게 됐는데, 그 작품 하나에만 50명이 넘는 건축 및 출판 관련 대가가 등장한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스스로도 성장했고, 그런 지혜를 관객께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힘들지만 보람도 크다."
정다운 감독. 장진영 기자
김종신 감독 겸 PD. 장진영 기자

Q : 앞으로 계획은.
A : 정 감독="꼭 하고 싶은 게, 고(古) 건축 프로젝트다. 선조가 창조했던 건축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다. 겸재 정선의 그림과 대동여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 우리네의 미학을 영상으로 살려내고 싶다. 일제강점기와 고속 개발의 역사를 지나면서 우리네 것을 잊지 않았나 싶다. 싹 밀어버리고 새 걸 짓는데 워낙 익숙한데, 원래 문화를 되새기는 다큐를 꼭 찍고 싶다."
김 PD="옛날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우리의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되새기자는 의미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즉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처럼 우리네 문화엔 우리네만의 멋과 맛이 있다."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의 한 장면. 정영선 조경가가 ″겨울에 아름다워야 봄도, 여름도 아름답다, 기대하시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메가박스 등에서 절찬 상영 중. 사진제공 영화사 진진


부부가 만든 이 영화는 EBS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으로도 선정됐다. "하늘보다 높은 하늘/바다보다 깊은 바다"라는 시를 쓰던 학생에서 조경의 길을 걷게 된 정영선 작가의 육성을 듣는 재미도 깊다. "겨울이 아름다워야 봄도, 여름도 아름답다"며 한겨울의 정원에 서서 "기대해"라며 활짝 웃는 정영선 조경가의 말은 비단 정원뿐 아니라 삶에도 적용될 터다.

정영선 조경가는 한국인 최초로 조경계의 최고 영예상이라 불리는 세계조경가협회(IFLA) ‘제프리 젤리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와 함께 정 조경가에 대한 전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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