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복수혈전의 굴레

천지우 2024. 4. 24.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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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에 '한국 지상파 텔레비전 뉴스의 이슬람 스테레오타이핑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석사 논문을 썼다.

팔레스타인 출신 미국의 비교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1978년 펴낸 '오리엔탈리즘'에서 서구 언론 속 중동 사람들은 언제나 인격이 무시된 채 비이성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군중으로 나타난다고 지적했는데, 이것이 한국 TV 뉴스에서도 드러나는지 확인한다는 취지의 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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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우 국제부장


17년 전에 ‘한국 지상파 텔레비전 뉴스의 이슬람 스테레오타이핑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석사 논문을 썼다. 팔레스타인 출신 미국의 비교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1978년 펴낸 ‘오리엔탈리즘’에서 서구 언론 속 중동 사람들은 언제나 인격이 무시된 채 비이성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군중으로 나타난다고 지적했는데, 이것이 한국 TV 뉴스에서도 드러나는지 확인한다는 취지의 연구였다.

한국 언론에서 국제뉴스는, 특히 주요국이 아닌 나라들의 뉴스는 대부분 서구 언론의 보도를 받아쓰는 것이니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뉴스 영상에서 이슬람권은 몰개성의 군중 이미지로 재현됐고 군중 속 남자들은 이성을 잃고 격정에 휩싸여 있었다. 여성과 어린이는 비극의 피해자로 울고 있거나 다쳐서 아파하는 모습이었다. 뉴스의 언어 표현도 ‘극도의 혼란, 참극, 재앙’ 등 부정적인 것 일색이었고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주인공(protagonist), 중동의 이슬람국가들이 적대자(antagonist)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현상은 이슬람권과 테러리즘을 동일시하는 부정적 스테레오타이핑(고정관념화)이니 바람직하지 않고 지양해야 한다는 게 논문 에 깔린 메시지였다. 당시에는 스스로 이것이 옳은 주장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17년이 지난 지금 다시 들춰보니 너무 순진하고 PC(정치적 올바름)에 경도된 주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상황이 달라진 게 별로 없어서 그렇다. 지금 중동에서 나오는 사진과 영상의 대부분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분노를 토해내는 군중, 오열하는 여성, 피 흘리는 아이들이다. 언론이 일부러 부정적·일탈적 사건과 장면만 부각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고 본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있다. 중동 속 ‘외로운 투쟁자’ 이스라엘에 대한 시각이다. 하마스와 전쟁 중인 이스라엘은 서구나 한국 언론에서 긍정 일변도로 그려지지 않는다. 하마스에 기습 공격을 당하고 전쟁을 시작한 초기에나 피해자 입장이었지, 이후 몇 배로 응징하면서 잔혹한 가해자가 돼버렸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 자국 신문 기고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가 복수에만 몰두해 이스라엘을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갔다며 “그들이 계속 정책을 추진한다면 이스라엘과 중동 전체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이 상태로 이스라엘이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과 온건 아랍 세력으로부터 고립된다면 잘 돼야 ‘중동의 북한’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라리의 글에서 틀린 말은 찾을 수 없다. 그런데 그는 “전 세계가 가자지구에서 나오는 끔찍한 이미지를 보고 있지만, 너무 많은 이스라엘 시민은 그걸 보지 않거나 그 모든 이미지를 기만적인 선전으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인 다수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있다는 얘기다. 안타까운 일이다. 대립하는 양측이 모두 이성을 잃고 격정에 휩싸여 있다면 갈등은 해소될 수 없다.

하라리는 전작에서 “21세기 전쟁이 아무리 실속 없는 사업이라 해도 우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며 “개인이나 집단 차원에서나 인간은 자멸을 부르는 행동에 빠져들기 십상”이라고 했다. 세계 정세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줬던 리콴유 싱가포르 초대 총리도 생전 인터뷰에서 이스라엘과 이란 등이 핵무기 사용에 관해 냉철한 판단을 할지 의문이라면서 “세계는 계산 착오를 일으킬 수 있는 무서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어리석음과 비이성이 나라를, 인류를 파멸로 이끈다.

천지우 국제부장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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