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우리는 어떤 통일을 바라는가

2024. 4. 24.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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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 경제학부

이전 보수 정부 때의 일이다. 정부 위원회의 공공외교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동행한 위원이 한국은 점진적 방식의 통일을 지향한다고 말했더니 미국 전문가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한국 대통령의 말은 다르다는 것이었다. 화해·협력 기간을 거쳐 남북 연합 단계로 나아가고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룬다는 한국의 공식 통일방안을 설명해도 ‘언제 그런 것이 있었냐’는 표정이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정부가 만든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국민이 많다. 보수 정부의 대통령은 ‘북한 붕괴 후 급진통일’로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을 자주 했다. 진보 정부의 대통령은 통일로 가는 첫 단계로서 ‘경협’을 강조했지만 그 이후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우리 국민이 알지 못하고 대통령조차 믿지 않는 통일안을 외국인에게 설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 통일 반대는 해결책이 아닌 함정
‘강하고 선한 국가’ 비전 확립하고
통일을 최종 목표로 유지하면서
중간 단계로 경제공동체 거쳐야

지정학적 격동의 시대에 우리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다. 갈팡질팡하게 되면 무력 충돌이나 영구 분단이 초래될 수 있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 때 만들어진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북한이 거부하지 않고 여야가 합의할 수 있었던 최대 공약수였다. 통일을 목표로 삼고 이를 단계별로 접근하는 방식 외에 다른 안이 나올 수 없었다. 또 단일 민족이 통일의 근거이자 동력이라는 점에 당시 대다수 국민이 마음을 같이 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30년 이상이 흐른 지금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중요한 도전에 처했다. 이제 이를 업그레이드한 새로운 통일방안으로 국민의 마음을 모아야 한다.

통일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이며, 이를 평화롭고 점진적 방식으로 추진한다는 민족공동체 방안의 핵심은 계승해야 한다. 통일 대신 남북 간 평화 공존을 최종 목표로 삼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해결책이 아니라 함정에 가깝다. 비정상 국가이자 남한을 적대하여 핵 무장한 북한과의 평화 공존은 어렵다. 북한 내부의 취약성은 핵을 직간접적으로 사용하려는 유혹을 배가한다. 북한발 위험 때문에 해마다 우리 국민은 보이지 않는 세금을 내고 있다. 이런 분단 비용이 수십 년 쌓이면 남한 한 해 국민소득의 절반 이상이 될 수 있다. 또 남한의 핵무장으로 핵 균형을 이루면 통일 없는 공존이 가능하다는 견해도 있으나, 그 현실성은 차치하고 외환위기 몇 배 이상의 경제적 충격을 초래할 것이다. 아예 북한 붕괴를 추진하자는 더 용감한(?) 주장도 있다. 그러나 남북 충돌의 가능성뿐 아니라 경제적 격차가 큰 지역 간 급진통일은 핵무장보다 훨씬 큰 경제적 비용을 수반한다.

민족공동체 방안에 비현실적인 부분도 있다. 남북 연합이 바로 그렇다. 북한이 사회주의 경제를 유지하는 한 북한은 발전할 수 없다. 이 상태로 남북이 연합하면 남한 경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크나큰 짐을 지게 된다. 일국양제(一國兩制)가 아니라 양국일제(兩國一制)가 되어야 남북 모두 급성장한다. 따라서 기존의 남북 연합단계를 시장경제에 기반한 경제공동체로 대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 민족공동체 방안의 화해·협력 단계 이전에 북한 비핵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혹은 비핵과 협력을 병렬하여 비핵·협력 단계를 1단계로 설정할 수 있다. 북한의 비핵화에 연동하여 제제를 해제하고 경협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경협은 경제공동체 형성의 마중물이자 디딤돌이 되도록 설계돼야 한다.

통일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북한 지역으로 확장하는 과정이다. 통일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자는 우리 국민은 없을 것이다. 북한 주민의 인권과 번영을 위해서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필수 불가결하다. 새로운 통일방안은 북한 주민과 관료의 역량을 끌어올려 북한이 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도움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대립 중에서도 대화하고 군사적 억지를 추진하면서도 관여를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지정학 바람이 반대로 불 때, 북한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다리를 만드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래서 통일을 떠밀려 택하지 않고 만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이 복합적 과정에 대한 인식이 올바른 통일정책의 첫걸음이다. 예전처럼 하나의 악기만으로 교향곡을 연주하려는 정책은 또 실패한다.

통일 방안이라는 지도가 있어도 동력이 없다면 목적지로 갈 수 없다. 우리는 민족이란 전통적인 동력에 가치와 편익(국력)을 더한 삼두마차를 몰아야 한다. 민족의 호소력은 아직도 작지 않지만 과거와 같은 힘을 내기는 어렵다. 북한 주민을 향한 공감은 우리 사회가 더 일궈야 할 가치다. 통일 편익은 또 하나의 추동력이다. 그러나 ‘대박’ 같은 미시적 계산으로써는 통일이란 거대한 산을 움직이기 어렵다. 통일은 ‘강선국(强善國)’이라는 큰 비전으로 승화돼야 한다. 우리는 한 세기 내에 민주화와 경제발전, 그리고 통일까지 완성한 성공의 대서사시로 세계에 선한 영향을 끼치겠다는 꿈을 가져야 한다. 통일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국력의 완성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왜 세계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가슴 뛰는 답이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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