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배신' 너머

고정애 2024. 4. 24.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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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배신’. 요새 여권을 내적 불안에 빠뜨리는 단어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지목해 사용했고, 윤석열 대통령의 멘토란 이가 동조했다. 한 전 위원장이 윤 대통령과 갈등한 걸 두고서다. 한 전 위원장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라고 반박했다. 윤 대통령과 한 전 위원장 간 오찬이 성사되지 않은 걸 보면 실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원래 대통령과 2인자의 관계는 늘 미묘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자의 반 타의 반’이란 말을 남긴 JP(김종필), YS(김영삼)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관계가 널리 알려졌으나 다른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JP로부터 “1인자와 걸을 땐 그림자도 밟지 않도록 물러나라”는 조언을 받은 노태우 전 대통령 정도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철저히 고개를 숙여 무사했다. 반면에 MB는 임기 중반 내키지 않음에도 박근혜 당시 의원이 차기 주자란 현실을 받아들였고, 자신의 손으로부터 권력이 빠져나가는 걸 참아냈다.

「 대통령과 2인자 갈등 반복돼와
이번에도 윤석열-한동훈 갈등
'배신' 규정 부당…그래도 풀어야

이를 공개적으로 ‘배신’으로 규정한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2015년 6월 국무회의장에서 “당선된 후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해 달라”고 했다. 당시 원내사령탑인 유승민 전 의원을 가리킨 말이었다. 유 전 의원은 지금도 ‘배신의 정치’란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으로선 유 전 의원이 행정부 권한인 시행령 제·개정권을 국회가 제어할 수 있게 야권에 양보한 건 선을 넘었다고 봤다. 과도한 타협이긴 했다. 그렇다고 배신이라고까지 해야 했나. 유 전 의원을 여러 차례 중용해 온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선 그렇게 느낄 소지가 충분했다.

유 전 의원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2005년 초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이 됐을 무렵, 이런 취지의 말을 했었다. “엄청난 대중 호소력을 가졌다. 아직 굳어 있지 않다.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다.” 단순 참모 이상을 기대했다. 자기 뜻이 채택되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실망했고 긴 침묵을 택했다. 원내대표직 도전은 ‘정치인 유승민’으로 서겠다는 독자 선언일 수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인정하지 않았다. 둘의 공개적 반목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잘 안다.

윤석열 대통령이 1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오찬 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대통령실]

매번 그런 걸 보면 권력의 속성일 수 있겠다 싶다. 누군가는 ‘코트(court·궁정)’란 단어를 쓰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1000년 전이나,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문법이 같다. 살아남는 것, 오래 버티는 것 외엔 없다”고 했다. 권력자를 향한 절대 충성 경쟁, 시기와 반목, 음해와 암투 등 말이다. 자의식은 사치라고 했다.

그렇더라도 ‘배신’은 과도한 규정이다. 새로운 시대는 현 시대의 반복일 순 없다. 새 인물은 현 인물의 되풀이일 순 없다. 어느 정도 현실을, 현 인물을 부정하지 않고선 발전할 수 없다. 부정당한 사실, 부정당한 인물에겐 부당한 일이다. 역사는 그러나 그런 사실과 사람들을 지천으로 깔고 전진해 왔다. 자신이 키운 ‘보잘것없는 배경의 여성’ 마거릿 대처에게 밀려난 에드워드 히스는 평생 분노했지만(별칭이 the Incredible Sulk, '놀라운 삐짐'이었다), 역사는 대처의 도전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그런 대처도 결국 밀려났다.

그러므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갈등은 필연일 수 있다. 어찌 관리하느냐는 선택일 수 있다. 가까웠던 사람 간 갈등 관리가 더 까다롭다곤 하나, 지지 기반이 해체된 여권이 자기파괴적 내분을 방치하는 건 지나친 호사다. 더욱이 야권과 협치하겠다는 마당 아닌가. 대통령 진영도, 한 전 위원장 진영도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특히 한 전 위원장은 역대 2인자들의 고민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고백하자면 정권 출범 때, 한 정치컨설턴트와 '윤 대통령과 한 전 위원장이 종국엔 갈라설 텐데, 언제가 될지' 얘기한 적이 있다. “둘의 특수관계를 생각하면 그래도 오래가지 않을까” 했다. 단견이었다.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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