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타임머신과 관혼상제 양복

2024. 4. 24.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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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소설가

옷이 없어 일찍 왔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형식 못 갖춰서
본질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가,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3년 전, 무더운 여름의 기운이 물러가고 코끝으로 상쾌한 가을바람이 느껴지던 시기였다. 나는 트렌치코트 깃을 올려세운 채 소설을 쓸 생각을 하며 옷장 문을 열었다. 그때 아내가 선언했다. “제발 옷 좀 버려. 비좁아 죽겠어.”

여기서 잠시, 고매한 독자를 판사로 모시니 내 가정사를 판단해 주시기를 바란다. 우리 부부는 결혼 후에도, 내가 혼자 살던 집에 계속 살고 있다. 당연히, 아내가 집에 들어올 때 나는 살림을 과감히 정리했다. 옷과 신발은 물론, 소설가에게 양식이 되는 책까지 천 권가량 버렸다. 심지어 자식 같은, 내가 쓴 책까지 버렸다.

하지만 살다 보면 짐은 또 생기기 마련. 이에, 또 여러 물건을 버렸으니 어떤 때에는 집필에 필요한 책까지 버려 버린 책을 다시 사는 촌극까지 여러 번 겪었다. 그렇기에,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 청력을 의심했다. 옷을 더 버린다면 나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기 전의 에덴동산 시절로 돌아가야 할 터였으니까. 한데, 아내는 ‘독일 나체촌으로 이주라도 하자’는 식으로 강경한 태세로 나왔다.

그리하여, 나는 평화주의자(를 가장한 소심한 남편)답게, 헤어지기 싫다며 아우성을 지르는 내 옷들에 과감히 작별을 고했다. 아내가 ‘제발 그만 해요!’라고 외치길 바라며…. 그렇게 고가의 옷, 아끼는 옷, 잘 어울리는 옷을 모조리 버리며 아내의 얼굴을 흘낏 봤는데 아주 만족한 표정이었다.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직감했으나, 나로서는 더 큰 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생애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으니 단 한 벌뿐인 내 ‘관혼상제용 양복’을 버린 것이다. 그때 아내는 대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빈 공간에 자신의 새로 산 원피스를 걸었다.

한 벌뿐인 양복을 버렸으니 그 후에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결혼식에 가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축의금만 보냈다. 하나, 임시방편도 한 철. 가까운 지인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니 장례식마저 빠질 수는 없었다. 되는대로 재킷을 걸치고, 그나마 양복바지 비슷하게 생긴 걸 입고 와이셔츠는 아니지만, 학생 시절에 입던 검은 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갔다.

다음부터는 복장이 신경 쓰여 누군가 상(喪)을 당했다는 연락을 받으면 무조건 소식을 들은 그날에 바로 갔다. 첫날에는 다들 정신이 없고 서둘러 오니 복장을 못 갖춰 입은 조문객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장례 소식을 들으면 가능하면 첫날에 일찍 가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다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들었다. 상주들이 내게 “이렇게 일찍 달려와 줘서 고맙다”라며, 고개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나는 단지 옷이 없어 일찍 왔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형식미를 갖추지 못해 본질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장례식의 본질은 슬픔에 빠진 유족에게 어서 빨리 가 위로를 건네는 것이니까. 훗날, 아내에게 고백했다. 애써 쿨한 척하며 유일한 ‘관혼상제 양복’마저 버릴 때는 사실 오기가 발동했노라고.

그러자, 아내는 태연하게 답했다. “알고 있었어.” 그래서 물었다. “그럼, 왜 안 말려줬어? 한 벌뿐인 양복이었는데.” 아내는 또 태연히 답했다. “알았으니까. 그 양복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가야 할 곳에는 가게 된다는 것을.” 맞다.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니까. 이리하여, 나는 누구보다 장례식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되었다. 모두 아내 덕분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읽은 아내가 고백했다. 사실, 자기도 그날 오기가 발동했다고. 새로 산 원피스를 좁은 옷장에서 구겨지지 않게 하려는 오기 말이다. 그럼 내가 졌느냐고? 아니. 이야기로 먹고사는 소설가가 아내 덕에 에피소드 하나를 챙겼으니, 최후 승리는 내 몫이다(라고 정신 승리를 해본다).

최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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