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주의 시선] ‘당선자 편향’의 늪

임종주 2024. 4. 24.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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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주 정치에디터

“생존자 부각의 이면에는 논리적 오류가 있다. 생존자들에게만 집중하고 실패자들은 등한시한 나머지 부정확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미국의 자수성가 사업가이자 작가인 엠제이 드마코는 베스트셀러 『언스크립티드』에서 잘 짜인 각본 같은 뻔한 삶의 틀을 깨고 주체적이고 성공적인 인생을 설계하려면 ‘선택된 것에 집중하고 탈락한 것은 무시함으로써 초래되는 오판’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고 주문한다.

드마코가 되짚은 ‘생존자 편향(survivorship bias)’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와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장거리 폭격기의 무사 귀환율을 높일 수 있을까 고민하던 미군은 적군의 대공 화기 세례 속에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한 전폭기의 피격 부위를 면밀히 조사했다. 그 결과 엔진과 연료 계통에서 각각 19발과 18발의 피탄 흔적이 발견된 반면 동체는 39군데가 총알에 뚫리거나 찢겼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가장 취약한 부분은 동체이며, 그곳을 우선 보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23년 10월 22일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사상 최초로 우리나라에 전격 착륙한 미군의 대표적 핵무장 가능 전략폭격기 B-52H. 프리랜서 김성태


그런데 헝가리 출신의 수학자 아브라함 왈드는 약한 곳과 강한 곳이 뒤바뀌었다고 반대 논지를 폈다. 미귀환 항공기가 조사 대상에서 아예 제외된 데 대한 통계적 오류를 지적하면서였다. 왈드는 자신의 생존율 예측 기법으로 동체는 오히려 강한 곳이기에 다수의 총격을 받고도 생환할 수 있었다고 가정했다. 가장 취약한 부분은 무손상 부위이며, 그곳을 공격당한 비행기는 추락해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기에 그쪽을 강화해야 한다고 추론했다. 왈드의 말이 맞았다. 그 덕에 더 많은 조종사가 사지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왈드의 연구는 수십 년간 군사 기밀로 분류됐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도 적용됐다.

생존자 편향에 사로잡히면 유니콘 기업이나 성공한 CEO, 역경을 딛고 일어선 슈퍼스타에게 과도한 관심이 집중된다. 성공 사례는 일반화하고, 출세 요인은 전문가의 솜씨로 둔갑해 합리화된다. 현실은 굴절되거나 왜곡되고 실패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길은 원천봉쇄된다. 미국 월가의 허상을 통렬히 꼬집고,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견한 『블랙스완』의 저자 나심 탈레브도 ‘검은 백조’처럼 발생 확률을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의 속성을 숨긴다며 생존자 편향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말 없는 증거를 무시하는 경향은 재능을 비교하는 일에 항상 도사린다. 승자독식이 이루어지는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보이는 그대로를 즐겁게 받아들이곤 하지만 남들의 성공담을 아무리 읽는다고 해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전체를 조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블랙스완』).

지난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의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자 총회. 뉴시스


국민의힘이 총선 생존자 즉 ‘당선자 편향’의 늪에 빠졌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당선자부터 찾았다. 4선 이상 중진 간담회를 시작으로 당선자 총회가 줄줄이 이어졌다. 지역구 당선자의 65%는 영남 출신이다. 선거 참패를 수습하기 위한 여론 수렴 차원이라곤 하지만, 그곳에선 당권을 노린 눈치싸움이 꿈틀댔다. 처절한 반성과 진지한 성찰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대로라면 다 죽는다”는 수도권 낙선자들의 아우성은 묻히고 “과거보다는 미래”라는 목소리가 부각됐다. ‘회사 체질이었으면 벌써 TF 만들어 움직였을 텐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는 기업인 출신 당선자의 쓴소리는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는 여당의 현주소를 웅변한다. 국민의힘이 만족할 만한 성과라도 거둔 듯 착각하게 만든다.

「 여당, 성찰 대신 당권 '눈치싸움'
'맹탕 백서' 내놓은 4년전 판박이
실패 쓴소리 외면하면 미래 없어

4년 전에도 꼭 이랬다.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은 “낙선자 총회부터 하자”는 고언을 외면하고 당선자 불러모으기에 바빴다. 낙선자의 목소리를 경청해 통렬한 자기반성을 하겠다던 약속도 결국 넉 달 만에 ‘맹탕 백서’로 뒤집혔다. 총선이 지났는데 굳이 잘못을 들춰내는 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아프게 곪은 살을 도려내야 할 백서 특위마저 비겁하게 뒤로 숨었다”는 자조가 생생히 떠오른다.

2020년 8월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제21대 총선 백서제작 특별위원회가 만든 백서 초안 표지. 중앙포토


이번 여당 참패 원인의 대부분이 대통령실에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오만·독선·불통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국민의힘 책임이 가려지는 건 절대 아니다. 한때 친윤계 초선의원 수십 명은 용산의 뜻에 따라 비윤계 인사의 당 대표 출마를 저지하려고 연판장을 돌리는 등 홍위병 역할도 마다치 않았다. 대통령실로 모든 책임을 돌리고 변명으로 회피한다면 어불성설이다.

“편향은 하나의 회로처럼 작동한다”(『편향의 종말』). 편향은 습관이고, 습관을 고치지 못하면 편향은 반복된다. ‘이대로라면 4년 뒤 총선도 답이 뻔할 것’이라는 추론은 생존자 편향과 달리 논리적 오류가 없다. 누군가에겐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이다.

임종주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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