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읽기] 부처님 가운데 토막으로 살기를

2024. 4. 24.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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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봄이 간다는데, 좀 걸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 홀로 길을 나섰다. 하염없이 세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더니, 발목에서 시작된 통증은 다리를 천근의 무게로 굳어지게 하였다. 일도 산책도 역시 쉼이 곁들여져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오늘은 아침 일찍 벌초(삭발)를 했다. 날이 더워 무명초(머리카락)가 조금만 올라와도 머릿속이 근질근질하다. 나른한 봄날에 벌초를 하고 나면, 개운하고 얼굴도 맑아지는 것 같아 좋다. 말쑥해진 모습으로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어느덧 야금야금 세월이 긁고 간 흔적들이 보인다. 세월이란 게 되돌릴 수도 없고, 빨리 가게 채근할 수도 없다. 시간이 아깝다고 모아둘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주어진 오늘을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 개인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회
한 사람 배려·분노 전체로 파급
위정자는 모두 위한 길 고뇌해야

마음 읽기

『무문관(無門關)』에 이를 대변할 멋진 글들이 있다. ‘봄에는 백화만발하고 가을에는 달빛 밝으며/ 여름에는 바람 시원하고 겨울에는 흰 눈 내리네/ 쓸데없는 일에 마음만 쓰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인생의 좋은 시절이라네(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또 이런 고측(古則)도 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조주종심(趙州從諗)선사가 그의 스승인 남전보원(南泉普願)선사에게 “무엇이 도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의 답변이다. “평상심이 곧 도이니라(平常心是道)” 하셨다. 평상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곧 도인이라는 얘기다. 우리가 구하는 도(道)는 내가 머문 자리에서 결코 멀리 있지 않다.

20대 때만 해도 ‘평상심이 도’라는 얘기를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특별한 일, 열정적인 도전을 해야만 멋지게 사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밥 먹고 잠자는 일이 뭐 그리 대수냐 싶었다. 하지만 중년의 나이가 되고 보니, 일상을 벗어나 찾아 헤매던 깨달음이 파랑새처럼 내 일상생활 안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책 제목처럼, 현재의 삶에 충실한 것이 멋진 삶임을 깨닫게 된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 직장, 사회도 안정되어야 한다. 며칠 전 내방한 여성 신도는 휴대전화에 남편은 부처님으로, 아들과 며느리는 각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입력해 놓았다고 했다. 남편을 부처님처럼 모시겠다는 뜻이다. 가족 모두를 불보살로 대하면 화낼 일이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 참 기발한 방편이구나 싶었다.

『화엄경』을 공부하면, 부처는 꼭 고타마 싯다르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법신(法身)으로서의 부처는 인간 붓다를 넘어 모든 존재 일반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인다. 모든 존재가 부처이며, 온 세상이 부처임을 가르쳐준다. 작은 세포 하나도 부처가 될 수 있으며, 우주 전체도 부처로 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화엄사상에서는 부처와 중생이 따로 나뉘지 않고, 이미 깨달은 부처와 아직 깨닫지 못한 미래의 부처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가족을 불보살로 생각하는 저 신도의 마음이 맥락 없이 과장된 것은 아니란 얘기다.

우리 사회의 모습도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마찬가지다. 각각의 개인이 모여 구성된 다수의 유기적 공동체가 우리 사회를 이루니 말이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전체는 하나와 낱낱이 이어져 있다. 한 사회에서 전체의 삶은 개인의 삶에 여러 가지 규정으로 영향을 끼치고, 개인의 삶은 가정, 직장, 국가 등과 연결되어 크고 작은 사회를 이룬다. 『화엄경』에서는 이것을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전체가 곧 하나’ 라고 표현한다.

이대로 보면, 한 사람의 문제라도 사회 전체로 파급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분노가 쌓여 주위를 어지럽게 만들며, 반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배려가 주위를 향기롭게 바꿀 수도 있다. 결국 나 자신이 부처가 된다는 것은 주위 존재들을 평온한 상태로 이끌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인간을 두고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지만, 실상 오장육부를 가진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수식어가 붙은 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살펴보니, 얼마 전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이 새로 뽑혔다. 정치와는 거리를 두어야 하는 출가자인지라 신문도 정치면은 건너뛰고 읽는 편이지만, 적어도 나라와 지역 발전에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 당선되기 바라는 마음은 여느 국민과 다르지 않다. 위정자들에게 부처님 가운데 토막으로 살기를 바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유연함과 굳건함을 지혜롭게 잘 쓸 줄 아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안위만을 우선하며 앞날을 모색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상심 유지를 바탕으로 진정성을 더하여 모두를 위하는 길을 고뇌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원영 스님·청룡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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