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은 빨강, 로맨스는 분홍... 극장 간판의 비밀

성하훈 2024. 4. 2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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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위경혜 <오락과 예술 사이 극장 간판화가>

[성하훈 기자]

지금은 사라져 명맥만 남았지만 옛날 크고 작은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나 다음 개봉작을 알리던 대표적인 홍보물은 간판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이나 대사를 담아 그려낸 극장간판은 일제 강점기 이후 1990년대 초중반까지 어느 극장이든 필수적으로 걸린 극장의 상징과도 같았다.

1960년대 후반 극장간판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6000~7000명에 달했을 만큼 간판 화가는 상영관 구성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점차 줄어들기 시작해 1970년대 후반에는 1500명 정도만 남았고, 1990년대 초중반에 와서는 전국에 300명 남짓 남았을 정도로 쇠퇴했다.

2000년대 들어 극장간판은 대부분 사라졌다, 한 극장에서 여러 편의 작품을 상영하는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가 등장하면서 손으로 그린 간판으로 영화를 알리던 시대가 저물어 갔다. 그저 일부 극장에서 명맥만 잇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사라진 극장 간판의 역사
 
 극장 간판의 역사를 정리한 <오락과 예술사이 극장 간판화가>
ⓒ 전남대 출판부
 
중장년 세대들에게는 영화의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으나, 이른바 MZ세대라 불리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낯선 옛 시대의 유물이 된 극장 간판. 전남대 위경혜 교수가 펴낸 <오락과 예술 사이 극장 간판화가>는 이 간판화가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한국영화에서 영화 미술의 한 영역을 차지했던 극장간판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로 광주지역 극장간판의 생성과 전개, 소멸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1934년 개관한 유서 깊은 광주극장에는 손으로 그린 간판이 명맥을 잇고 있다. 지역 영화사 연구의 한 결과물이지만 광주의 간판 화가들이 서울에서 극장간판과 광고업을 병행하기도 했었기에 서울의 극장간판과 관련된 소소한 이야기도 일부 아우르고 있다.  

책에 따르면 광주에서 극장 간판을 처음 그리기 시작한 극장 간판 1세대로는 미술인 김원용을 꼽는다.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조선미술전람회(일명 선전)에서 유화 부문에 입선한 김원용은 이후 광주 제국관의 실력 있는 일본인 간판 화가에게 그림을 배웠다. 일본인 스승은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그리는 것이며, 그리는 솜씨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을 훔쳐 가는 것이다"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가 잘나가던 시절, 한 해 제작 편수가 150편에 이르면서 극장간판 화가는 극장 종사자 가운데 가장 많은 월급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는 일이었다. 김원용은 극장간판을 그리는 한편으로 극장에서 열린 가무단의 공연에 사회로 나설 만큼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줬다.

김원용 아래 그림을 배우는 문하생들이 있었는데, <오락과 예술 사이 극장 간판화가>는 오랜 시간 광주지역 극장의 간판을 책임졌던 김창중 화가를 중심인물로 두고 간판 화가의 삶을 엿본다. 김창중은 1932년생으로 1936년 부친이 자리잡고 있던 일본 후쿠오카로 건너가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귀국한 부친을 도와 행상을 했으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았고 소질이 있던 그림 그리기를 하고 싶어 간판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김원용의 제자였던 광주극장 미술부장 천기봉을 찾아가 견습생이 됐고, 도제 방식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우연하게 운명처럼 김원용을 직접 만나게 되면서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고 간판 화가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한 편의 영화를 압축적으로 간판에 설명
 
 1971년 서울시내 한 극장의 상영작 소개 간판
ⓒ 국가기록원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간판 제작의 이면은 흥미롭다. 간판 구성의 권한은 미술부장에게 있었는데, 흥행 성적에 민감한 배급사가 간판 그림에 들어갈 내용을 조언하면 적극적으로 수렴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종 결정권자는 미술부장일 만큼 미술인의 자율성과 주도권이 인정됐다. 간판 그림은 영화사에서 보낸 포스터나 전단지에 적힌 설명을 읽어보고 특정한 장면을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외국영화보다 한국영화를 그리기 어려웠던 것은 밋밋한 한국인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재현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힘든 일은 한 편의 영화를 압축적으로 간판에 설명해야 하는 점이었다. 따라서 극장 화가는 시나리오를 찾아 읽어보기도 하고, 한국영화는 시사회에 참석해 이야기의 흐름 분석에 집중해야 했다.

간판 제작의 역점 사항은 배역의 중요도와 내용 전달의 명확성에 따라 인물 크기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액션 영화는 빨간색과 같은 원색 계열의 강렬한 색깔을 칠했고, 슬픈 감정을 유발하는 영화는 파란색 계통을 주로 썼다. 로맨스 영화는 연애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분홍색을 사용했으며, 미스터리 장르는 어두운 색깔을 담았고 한다.

한편으로 극장 간판 이야기에 얽힌 그 시절 한국영화의 풍경을 전하기도 한다. 서울 영화사의 제작비 조달에 큰손 역할을 했던 지방 극장과 극장이 없는 지역으로 찾아가던 이른바 '로뗀바리(노천극장 순회상영)' 에피소드 등이다.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흥행사로 광주 중앙극장 대표였던 이월금 선생의 이야기는 대표적이다. 여걸로 통했던 이월금 대표는 서울의 영화사에서 제작비 투자를 요청할 때 어떤 배우를 쓸 예정인지 묻고는 마음에 안 들면 특정 배우의 캐스팅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 요구를 받아들인 작품들이 흥행하면서 영향력이 강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극장 간판 화가들의 월급을 지급할 때는 삭감을 원하거나 페인트를 아껴 쓰라고 당부할 만큼 인색한 면모도 있었다.

영화 간판만 그리던 김창중은 흥행업에서도 도전하게 되는데, 1970년대 필름을 들고 비도시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순회 상영에 나서게 된다. 35mm, 16mm 영사기를 차에 싣고 극장이 부재한 소도시나 마을을 돌면서 공터나 시장터에 가설로 만든 공간에 영화를 상영하는 것으로 '로뗀바리'라 불렀다. 반공영화가 중고생 단체관람의 필수였던 시절 학교 강당을 빌려 검은 장막을 씌우고 영화를 상영했다. 전직 교장을 고용해 인맥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간판 화가에 대한 낮은 인식과 편견
 
 극장 간판의 맥을 잇고 있는 광주극장에서 운영 중인 영화간판 시민학교
ⓒ 광주극장 제공
 
간판 화가들은 옥외광고업체 대표가 사업적 성공을 거두거나, 간판 그림을 기반으로 유명 화가에게 수업을 받은 후 국전에 입선하는 방식으로 유명한 미술작가로 발전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극장 간판 그림을 낮게 보는 인식과 간판 화가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이 남아 있는 것은 부담이었다.

언론도 그들의 성공을 전하면서 '극장 화공이 옥외광고 대부가 됐다'는 식으로 '화공(畫工)'을 강조해 편견을 담기도 했다. 창작자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성공했음에도 여전히 극장간판 화가였다는 것을 굳이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은 분이 있는 것은, 극장간판 화가 세계 명암이기도 하다.

<오락과 예술 사이 극장 간판화가>는 사료적 가치가 있는 사진과 함께 그 시대의 풍경을 전하고 있다. 2000년대 이전 극장 간판 추억할 수 있는 안내서로서 역할을 한다. 광주에 초점을 맞췄으나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 있던 간판 화가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좋은 단초가 된다.

저자인 위경혜 교수는 지역의 영화와 영화인, 영화사 등 자칫 잊힐 뻔한 과거의 영화문화를 남기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그의 노력으로 시간이 흘러 잊힌 이야기들이 역사로 정리됐다. <'돌아올 수 없는' 경계인 최남주>(2022), <한국의 극장>(2017), <광주의 극장 문화사>(2005) 등이 대표적이다. <오락과 예술 사이 극장 간판화가>는 숨겨진 영화 문화사 찾기 작업의 연장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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