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불과 종소리 [조남대의 은퇴일기㊿]

데스크 2024. 4. 2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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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한 바람은 봄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오랜만에 기차여행을 떠나선지 출발시각보다 1시간이나 먼저 용산역에 도착했다. 아마 문학기행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 아닐까. 가는 곳도 여수 달마사라고 한다. 낭만이 가득한 여수 밤바다와 배가 불룩한 달마스님이 연상되니 어찌 설레지 않겠는가

달마사 사찰 전경
달마사 정면에 계시는 달마스님 상

여수엑스포역까지는 KTX로 3시간은 족히 달려야 한다. 차창 밖 먼 산꼭대기에는 흰 눈이 소복하다. 들판과 야산의 초목들은 아직도 대부분 회색이다. 제대로 푸른 잎으로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 문학단체 회원인 여수 달마사 주지 스님의 초청을 받아 1박 2일 일정으로 문학기행을 가는 것이다. 여수와 달마사라는 곳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 같아 흔쾌히 동참했다. 스님은 등단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각종 문학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글쓰기도 열심이어서 얼마 전에 ‘이 세상에 올 때의 약속’이라는 철학적 의미가 담긴 멋진 시집을 내기도 했다. 관심을 두고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은 당할 수 없듯이 출간한 시집으로 이번에 작품대상을 받는 등 빼어난 실력을 보인다.

달마사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문인들

스님은 승합차를 몰고 기차역까지 마중을 나왔다. 돌산대교를 지나서 산길로 접어들자, 남향으로 아늑하게 자리 잡은 달마사가 어서 오라고 반긴다. 옹기종기 지붕 맞대고 있는 마을과 여수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하고 시장할까 하여 공양간에는 꼬막 비빔밥을 준비해 두었다. 터질 것같이 오동통한 꼬막에 각종 나물이 뷔페식으로 차려졌다. 시금치. 취나물, 말린호박나물을 비롯하여 이름 모를 산나물과 봄동 김치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푸르름과 향긋함이 입맛을 당겨 비빔그릇에 나물을 수북이 담는다. 거기에다 금상첨화로 달래간장을 듬뿍 넣어 비비자, 고소하고 상큼한 풍미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한 숟갈 넣으니 입안 가득히 봄의 감미로움과 싱그러움이 느껴진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후딱 한 그릇을 비웠다. 후식으로 나온 과일과 제대로 갖춘 다기에 전통차는 완벽한 정찬의 마무리로 손색이 없음이라. 달마대사가 환생한 듯 배가 불룩해져 만족한 미소가 가득하다.

바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문우들
달마사 점심에 나온 나물 반찬

저녁 식사 후 배낭을 4개 방에 나누어 넣고 밤바다 구경을 나섰다, 해상케이블카 타는 곳은 평일임에도 길게 줄이 이어졌다. 케이블카에서 보이는 불을 밝힌 부둣가와 반짝이는 조명으로 치장한 거북선대교, 오색등을 단 유람선이 미끄러지듯 오가는 항구도시는 여느 외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일출정 전망대에 올라 시내를 조망하고 들뜬 마음으로 사찰로 돌아왔는데 우리방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낮에 따끈하던 방바닥이 썰렁하다. 얼마나 급히 나왔으며 방문 닫는 것을 잊고 온 모양이다. 주지 스님은 도시에서 따뜻하게 지내다 온 문우들이 차가운 방에서 새우잠 잘 것이 염려되었던지 장작을 가득 넣으면서 한 시간쯤 지나면 따뜻해질 것이라고 한다. 아랫목에 3명이 자리를 펴고 나는 젊다는 이유로 스스로 윗목에 가로로 자리를 잡았다. 먼 거리를 기차로 이동한 데다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녔더니 피곤하여 대강 발을 씻고 양치질만 한 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윗목이지만 그렇게 차갑지는 않았다.

군불을 너무 많이 때어 장판이 눌은 모습

어릴 적 시골에서 지냈던 기억이 떠오른다. 8형제가 온 방 가득할 정도로 큰 이불에 들어가면 차가운 감촉으로 몸이 움츠려진다. 이불 바깥에 나온 얼굴은 차갑지만, 목까지 끌어당겨 형제들끼리 부여안고 가만히 있으면 몸의 온기로 잠이 들곤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윗목 사기그릇에 담아 두었던 물이 얼어 있기가 일쑤였다.

잠결에 인기척이 들려 방바닥에 손을 넣어 보자 따뜻하다. 아침에 일어나자 아랫목에서 잠자던 문우들의 이불이 이리저리 흩트려져 있고 비닐장판이 시커멓게 탄 자욱이 보인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옆의 보일러 방에서 잠자던 문우가 방이 썰렁 하자 보살에게 전화하여 “불 좀 지펴 주세요”라고 하자 아궁이 방인 우리가 전화한 줄 알고 저녁에 장작을 넣었단다. 그런 것도 모르고 새벽 예불을 마친 스님이 우리 방이 추울 것 같아 또 아궁이에 장작을 가득 넣은 것이다. 한 번만 넣어도 되는 장작을 세 번이나 넣었으니 장판이 타지 않고 견딜 수가 있겠는가. 그 위에 깔았던 요와 이불까지 검게 탔는데도 엉덩이에 화상을 입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아침에 윗목에 깔았던 요를 걷자 발바닥이 뜨거워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멀리서 온 문우들을 따뜻한 방에서 재우려는 자비심이 넘쳐 일어난 해프닝이 아니던가. 하여튼 50년 만에 온돌방에서 몸을 지지며 하룻밤 지내자 추운 날씨에 여행하느라 쌓였던 피로가 말끔히 사라졌다.

달마사 부엌의 솥과 아궁이

먼동이 트기 전 잠결에 희미하게 음률을 담은 소리가 들린다. 새벽 4시다. 스님이 두드리는 목탁 소리 같다. 차가운 날씨에도 몸과 마음을 단장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우주 만물을 깨우기 위한 의식이 아닐는지. 마당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소리가 가슴 깊이 스며들어 차분하게 한다. 목탁 소리가 끝나자 좀 더 강렬하면서도 긴 여운을 남기는 범종이 울린다. 우리 방 위쪽 종각에 매달려 있었는데 깊은 산중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잠결에 들려오는 범종의 울림이 이렇게 마음을 어루만지며 감미롭다니. 무수한 종소리를 들어봤지만 이런 감동을 주는 것은 처음이다. 통일신라 시대 안타까운 전설 속에 만들었다는 에밀레종 소리가 이런 느낌일까.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리던 소리가 어느 순간 멈춘다. 아침에 일어나자 잠결에 들었던 목탁과 종소리는 지난밤에 꾸었던 일장춘몽처럼 가물가물하다.

거북선대교의 야경

도시의 성당과 교회 종탑의 종은 주변에서 시끄럽다는 항의로 벙어리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달마사의 목탁과 범종 소리는 동네 사람들을 잠에서 깨워 일과를 시작하도록 알리는 괘종시계 역할을 하고 있단다. 종소리가 울리지 않으면 스님이 아프신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바닷일을 나가면서도 왠지 불안하고 찝찝하기도 하단다. 달마사에서 울려 퍼지는 목탁과 종소리는 이제 주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평화로운 아침을 선사하는 소통의 매개체가 된 것이 아닐까. 오랜 세월 동안 이웃의 가슴속에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니 얼마나 반갑고 다행스러운 일인가.

항일암 원효대사 좌선대와 암자

남해안의 봄바람이 불어오는 달마사와 여수 일원의 문학기행을 통해 몸의 활기를 듬뿍 받아 온 것 같다. 스님의 말씀처럼 달마사의 정기를 받아서 그런지, 몸을 녹일 듯한 군불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이 주효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함께한 문우들 간의 친목을 돈독히 하고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소재를 얻은 것도 큰 소득이다. 기회가 된다면 달마사에 한동안 지내면서 맑은 공기 마시며 마음을 추슬렀으며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달마사 군불과 종소리는 오랫동안 뇌리에서 온기와 울림으로 맴돌 것 같다.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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