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곤 칼럼] 그들만의 참호에 갇힌 윤석열 정부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경제부처 관료를 지낸 사람의 회고다. ‘우리 부처는 경기고-서울 법대 아니면 명함도 못 내밀었어요. 서울 법대 출신이 서울 상대를 우습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출근 첫날 자기소개서를 제출했더니 과장이 부르더군요. 출신 대학이 서울 상대일 텐데, ‘이응’ 받침을 빠뜨려 사대로 잘못 썼다는 겁니다. 사대가 맞다고 했더니 순간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감히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왔느냐는 표정이었습니다. 평생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학벌을 유난히 따진 드림팀(?) 경제부처는 외환위기를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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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공부 1등=세상 1등’은 큰 착각
지역 남녀 학교 다양해야 강한 조직
윤 대통령, 학벌·출신·인연 매달려
그걸 깨야 국정 운영도 바뀔 수 있어
」
학교 공부 1등이 모인다고 뭐든 잘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있으면 사고의 틀이 닮아간다. ‘우리가 최고’라는 집단 최면으로 현실에 안주한다. 학교 선후배로 얽혀 있어 ‘노’라고 하기도 어렵다. 어느 조직이나 학교, 지역, 남녀, 세대를 골고루 품어야 강해진다. 다양한 의견이 나오면서 최적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 특정 학교 출신이 몰려 있거나 지역색이 짙은 조직은 위기에 약하다. 기업 중에는 대우와 금호가 그랬다. 야구팀 1~9번을 홈런 타자로만 채우면 강팀이 될 수 없다. 대학도 타교 출신 교수를 많이 채용해야 학문의 폭이 깊어진다. 순종보다 잡종이 강한 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두 가지 재주를 타고난다. 공부는 시원찮아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 겸손, 배려, 책임감, 추진력, 감성…. 이런 덕목이 시험 문제 몇 개 더 푸는 ‘공부 머리’보다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서 숨은 재능을 만개하는 사람도 많다. 대학 간판 하나로 섣부르게 재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정부처럼 여러 분야를 다루는 조직에선 말할 것도 없다.
윤석열 정부는 처음부터 서울 법대와 검사 출신 일색이었다. 다들 걱정했지만, 대통령은 눈치 안 보고 이들을 중용했다. 권력이 영원할 것 같은 기세였다. 공부 1등이면 세상에서도 1등이라고 여겼는지 잘 모르는 분야까지 이들로 채웠다. 눈치 빠른 기업도 검사 출신을 늘렸다. 정부에 고시 붙은 사람, 갑의 지위를 누린 사람, 상명하복에 익숙한 사람이 모였다. 여기에 대통령이나 김건희 여사와 개인적 인연이 있는 사람이 더해졌다. 사시 공부를 같이했거나 일하다 만났거나 동창, 고향 친구까지. 철저하게 대통령 부부 중심의 아주 좁은 인재풀이었다. 대통령은 “인사 기준은 전문성이고, 학벌은 안 따진다”고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설령 그렇더라도 국민이 불편하게 여기면 조심해야 했다.
정부가 대놓고 학벌과 출신, 인연을 따지자 국민은 새삼 절감했다. 우리 아이는 좋은 대학에 보내야겠다고. 사교육 열풍이 더 세졌다. 대통령이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빼라고 지시했지만, 병 주고 약 준 셈이다. 학벌 우선 사회에서 뭐를 한들 사교육이 잡히겠나. 경쟁에 내몰릴 걸 생각하면 아이를 낳고 싶겠나.
똑똑한 사람이 모였다는 정부가 눈치 못 챈 게 있다. ‘그들만의 리그’를 지켜보면서 민심이 떠나고 있었다. 대통령 주변이 거대한 기득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기득권 타파를 꺼내 들면 ‘누가 누구를 탓하나’라는 반감이 들었다. 집권 초기부터 대통령 지지율이 30%대에 그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총선에서도 여당은 한동훈 비대위원장부터 출마자까지 검사 출신이 많았다. 그 와중에 대통령과 한 전 위원장의 사이가 틀어졌다. 온통 검사 출신만 보이는 게 못마땅하던 차에 다투기까지 하니 어처구니없었다. 총선은 처음부터 지고 들어간 싸움이었다.
민심 이반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통령은 연초부터 민생토론회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대통령은 “국민만 바라본다”고 했다. 잘 짜인 연출만으로는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대파 875원 발언은 전후 맥락을 보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일이 커진 건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자신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는 데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김 여사 명품백은 사과 시기를 놓쳤다. 이태원 참사도 행정안전부 장관 같은 고위층 누군가가 책임져야 했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으면 앙금이 남는다. 국민은 벼르고 있다가 총선에서 표로 갚아줬다. 회초리 맞을 걸 피하다 몽둥이로 맞은 셈이다.
대통령은 2년 전 취임사에서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 선택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했다. 지금 대통령 주변의 모습 아닌가. 학벌, 출신, 인연으로 쌓은 참호에서 끼리끼리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들은 건 아닌가. 총선 참패 후에도 대통령은 별로 바뀐 게 없다. 다음 날 56자짜리 성의 없는 대독에 이어 1주일 후 ‘비공개 사과’로 실망을 키웠다.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였다. 지지율이 23%까지 추락한 지난 주말, 대통령이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낙선자를 만나 쓴소리를 듣겠다고도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 흔쾌하게 하는 건지 아직은 긴가민가하다. 왠지 궁여지책 같다.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으려면 참호를 확실하게 깨고 나와야 한다.
고현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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