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축제가 끝난 거리, 타락한 언어들이 뒹군다
새로운 언어를 찾아서
서울대학교 학생들도 청년다운 패기로 이 어려운 과제에 도전했다. 서울대학교 학보 ‘대학신문’ 기자들은 4월 1일 만우절을 맞아 다음과 같은 제하의 속보를 냈다. “올해부터 중간, 기말고사 사라진다.” “이번 정기고사 폐지를 통해 기존의 교육 패러다임을 벗어남으로써 글로벌 학계를 선도하는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것이 본부의 설명이다.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고 유홍림 총장의 결재만 남겨둔 상황이다” 운운. 이 속보는 모범생다운 문장으로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만우절이지롱. 독자님들, 이번 학기 중간고사도 힘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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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혐오·조롱·막말 난무했던 4월
시민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새로운 정치를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
거짓말 혹은 농담으로 시작하는 4월
실로 무난하고 건전하고 영양 상태가 좋은 나머지 피둥피둥한 느낌까지 드는 만우절 기사가 아닌가. 여전히 대학에서는 밝은, 지나칠 정도로 밝은 청년들이 시련 없이, 지나칠 정도로 시련 없이, 쑥쑥 잘 자라나고 있구나! 이 해맑은 기사를 읽는 이는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고, 혈액이 맑아지고, 심신이 안정되어, 만수무강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기사는 만우절을 맞아 가뜩이나 촌철살인의 농담을 기대하는 독자의 전두엽을 자극하기에는 지나치게 순한 맛이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데, 이 청년 기자들이 이토록 순한 맛으로 4월의 한국 사회에 만연한 독한 문제들을 정교하게 해부할 수 있을까.
이 사회의 남녀노소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정치 사회 현실은 실로 만만치 않다. 전 지구적 기후 위기 속에서, 포연이 가시지 않는 국제 정세 속에서, 추락을 거듭하는 각종 경제 지표 속에서, 인구 감소를 통한 사회적 자살이 감행되고 있다. 그러한 한국 사회의 2024년 4월은 다름 아닌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달.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좌우할 선거가 있기에, 정치인들은 만우절이 지나도 거짓말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거짓말. 유권자들이 이미 거짓말인 줄 알고 있기에, 거짓말이 아니라 유세가 되어 버리는 거짓말. 누구나 과장된 홍보를 기대하고 있기에, 어지간한 유세는 실패하게 되는 어려운 과제 같은 거짓말. 선거철이 오면 이 어려운 과제에 기성 신진 가리지 않고 정치인들이 도전한다.
침묵하면 패배하는 유세 현장
유세의 현장이란 말로 가득한 세계다. 이것은 침묵하면 패배하는 게임이다. 확성기를 뺏기면 정치적 생명이 끝장나는 게임이다. 질세라 벌떡 일어나 무의미한 이야기일망정 큰소리로 끊임없이 말하기 시작한다. 누구나 확성기를 들고 말하기에,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세계. 나직하게 말해서는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고,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기에, 앞다투어 소리 높여 말하고, 모두가 소리 높여 말하기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기에 확성기를 사용하고, 너도나도 확성기를 사용하기에 소리가 소음이 되어버리는 세계. 원하지 않는 광고전단이 가득한 우편함 같은 세계, 이 세계에서 떠도는 말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그 말들은 단죄의 언어이자, 조롱의 언어이자, 막말의 언어이자, 폭로의 언어이자, 원한의 언어이자, 보복의 언어이자, 응징의 언어이자, 아집의 언어이자, 예언의 언어이자, 광기의 언어였다. 그 말들은 요란을 떠는 언어이자, 점보트론(대형 전광판)의 언어이자, 선동만을 위한 언어이자, 책임을 최소화하는 언어이자, 번들거리는 언어이자, 석고대죄하는 척하는 언어이자, 호통치는 언어이자, 팬덤을 결집하는 언어이자, 선무당의 언어였다. 그 말들은 양심을 내세운 몰양심의 언어이자, 반성했다는 자격증을 얻기 위한 언어이자, 생각의 정지를 선언하는 언어이자, 작은 것은 무시하는 언어이자, 남 허물에 돋보기를 갖다 대는 언어이자, 남 상처에 꼬챙이를 집어넣는 언어이자, 사실과 추측을 한 그릇에 넣고 비비는 언어였다. 그 말들은, 그 순간에만 절박한 호소의 언어이자, 이번에만 매출을 올리기 위한 선전의 언어이자, 사태를 직면하는 듯하되 결국 회피하는 언어이자, 무작정 동원하기 위한 언어이자, 유권자를 포획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언어이자, 찬성의 알고리듬을 주입하려는 언어였다. 그 말들은 단시간에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한 언어이자, 마치 상대의 전모를 속속들이 아는 척하는 언어이자, 도저히 지키려야 지킬 수 없는 공약의 언어이자, 억지로 이분법을 강요하는 언어이자, 너무 추상적이어서 와 닿지 않는 선언의 언어이자, 기어이 상대를 감옥에 보내버리겠다는 다짐의 언어이자, 디톡스가 필요한 언어였다. 이렇게 거대한 언어의 폐허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선거운동이라고 부른다.
타락한 언어의 세계를 거부해야
이제 그 정신 사나운 축제가 일단락되었다. 축제가 지나간 장바닥에는 나르시시스트와 권력 성애자와 관심 종자들이 버리고 간 권력의 잔해들이 흩어져 있다. 이렇게 정치를 해놓고 이렇게 정치하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제 횡단보도를 건너고, 식사 주문을 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이산화탄소를 내쉴 것이다. 이제 다시 은은하고 차분하고 담담하게 국민을 대변하고, 나라의 운명을 논하고, 선출된 권위를 내세우고, 집에 돌아가서 발 뻗고 잠도 자고 그러겠지. 아무렇지도 않은 양. 마치 그런 정치를 안 한 사람처럼. 마치 멀쩡한 언어를 내뱉은 사람처럼. 그러나 당신들이 내뱉은 언어는 여기에 남아 있다.
선거를 빙자해서 방류된 혐오와 자화자찬의 언어는 감정적으로 들떠 있으며, 미학적으로 조악하며, 철학적으로 빈곤하다. 그 비대한 권력욕의 과장된 언어가 만든 세계에는 나직하게 엄격하고 성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시민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러한 언어의 세계 속에서 나지막하게 일상을 저공 비행하는 지혜와 위엄과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것은, 섬세하면서도 유유자적한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는 것은, 사막에서 심해어를 만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이 타락한 언어의 세계를 거부해야 한다. 그 들뜬 언어가 주는 야릇한 흥분의 유혹을 거부하고 한껏 도망쳐야 한다. 참정권을 포기하거나, 해외 이민을 가라는 말이 아니다. 참여라는 명분으로 그 타락한 언어를 순순히 수용하지 말고, 다른 언어로 지어진 세계를 꿈꾸어야 한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세계에서 태어날 수는 없지만, 동료 시민들과 함께 갈고 닦은 보다 나은 언어의 세계 속에서 죽을 자유는 있다. 따라서 이 언어의 폐허를 벗어나 부지런히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기 시작해야 한다.
쉬우면서도 품격있는 언어를
유권자는 공약을 비교해 보고 투표하기도 하지만, 각 정당과 정치인의 언어가 짓는 상징의 세계에 투표한다. 어떤 경제 정책도, 어떤 사회 비전도, 어떤 정치 이상도, 어떤 외교적 자세도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유권자에게 다가간다. 따라서 새로운 정책을 개발하는 일만큼이나, 새로운 정강을 확정하는 일만큼이나, 새로운 연대를 창출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는 일이다. 이성적으로 타당하기만 하고 감정적으로는 메마른 언어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타당한 동시에 감정적으로 호소력 있는 언어를 발명해야 한다. 옳기만 하고 지루한 언어가 아니라 옳으면서도 매력 있는 언어를 발명해야 한다. 쉽지만 품격을 잃은 언어가 아니라 쉬우면서도 품격있는 언어를 발명해야 한다. 일상을 건드리되 그 일상에서 끝나지 않는 언어, 원대한 동시에 일상에 닿아 있는 언어를 발명해야 한다. 기존 관념에 갇히는 대신 기존 관념을 활용하되 넘어서는 언어를 발명해야 한다.
따라서 내년 4월 1일 만우절에는 새로운 속보를 기대한다. 프레임에 종속되는 대신 프레임을 비트는 ‘개드립’ 같은 속보를 기대한다. “올해부터 중간, 기말고사 사라진다”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은 속보를 내는 것은 어떤가. “학생들은 올해부터 매시간 시험 치르기를 원해.” “평생 시험을 치러온 학생들은 잠시도 시험을 치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수업시간마다 시험 치르기를 애원함에 따라 기존 중간, 기말고사는 자연히 사라지게 된다. 기존 교육 패러다임에 과도하게 적응함으로써 현시대에 걸맞은 광인이 되겠다는 것이 학생들의 포부이다” 운운. 이 속보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우리가 잘하는 것은 시험공부뿐입니다. 우리는 고, 고통을 사랑해요.” 자신을 놀릴 수 있다는 것은 자신과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 자신과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은 자신보다 큰 세계가 있음을 인지하는 것, 4월 선거의 패자도 자신을 너무 확신한 나머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없었던 이가 아니었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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