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현의 시선] ‘주먹 쥐고 구구단’의 나라

김승현 2024. 4. 23.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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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 사회디렉터

“어지럽습니다. 나라를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해도 되나요?”

한덕수 국무총리의 지난 19일 특별브리핑 기사에 붙은 독자의 댓글이다. 의대 증원을 둘러싼 의정 갈등을 지켜본 시민들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대통령과 정부, 의료계를 향한 촌철살인의 담화문인 셈이다.

「 2000명 ‘주먹구구’ 자인한 정부
브리핑선 정책 미숙 감추기 바빠
‘주먹’만 쥔 의료계도 볼썽사나워

‘철옹성’ 같던 의대 증원 규모 2000명을, 올해는 최대 절반(1000명 증원)까지로 깎을 수 있게 허용한다는 정부의 ‘결단’은 자연스레 “이러려고 2개월간 그렇게 지지고 볶았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있다. 롤러코스터 타는 것 같은 추진력과 급브레이크의 반복. 현기증을 느낀 국민들의 머릿속엔 ‘주먹구구’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을 것이다.

‘주먹구구(~九九)’라는 말을 주먹구구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필자의 허술함도 새삼 깨닫게 됐다. ‘주먹 쥐고 구구단’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가락을 꼽아서 하는 곱셈이 오죽하겠는가.

공백과 갈등의 두 달을 돌아보면 윤석열 대통령이 가장 못 참았던 말도 그것이었다. 총선을 열흘 앞둔 지난 1일 대국민 담화에서 “2000명은 그냥 나온 숫자가 아닙니다”라고 정색을 했다. “일부에서는 일시에 늘리는 것이 과도하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정부가 주먹구구식, 일방적으로 증원을 결정했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라면서다. 이어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하여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이고 이를 결정하기까지 의사단체를 비롯한 의료계와 충분하고 광범위한 논의를 거쳤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주먹구구라는 혐의가 억울하다는 장황한 변론이었다.

10여 년 뒤 의사 수 부족, 고령화 사회의 의료 수요, 해외 선진국의 현황 등 숫자를 도출하는 데엔 주먹구구단이 아니라 첨단 컴퓨터 프로그램이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단한 최솟값을 축소했으니 정책 추진이 주먹구구였다는 비난은 감수해야 하는 처지인 건 분명하다.

그런데, 정부는 결단의 이유마저도 ‘면피’에 집중했다. 의료 정책 전문성이 없는 국립대 총장들을 ‘해결사’로 내세운 것부터 뜨악했다. 한 총리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6개 거점 국립대 총장들이 정원 2000명을 증원하되, 각 대학이 처한 교육 여건에 따라 2025학년도 신입생 모집에 한해 증원분의 50% 이상 100% 범위 내에서 신입생을 자율적으로 모집할 수 있도록 조치해 줄 것을 건의했다. 국민과 환자, 예비 수험생과 학부모, 의대생과 의대 교육 정상화를 위해 그것을 허용하는 결단을 했다.”

국립대 총장들이 걱정했다는 변수 중에 기존에 안 알려진 게 있는가. 한 총리는 “건의안을 보내주신 총장님들의 지혜와 선의” “사회적 갈등이 극심한 사안에 대해 다양한 집단이 처한 상황을 고려한 현명하고 합리적인 대안”이라는 미사여구로 감사의 뜻을 표했지만, 정부의 미숙함을 가리려 한다는 인상을 남겼다. 총선 참패라는 국민의 회초리를 맞고도 민망한 멍 자국부터 감추고 싶었던 것인가. 결국, 해법마저도 주먹구구가 되고 말았다.

한심한 정부만큼이나 의료계도 볼썽사납기는 마찬가지다. 정부가 자신들의 ‘노예 신세’를 몰라준다며 병원을 떠나버린 전공의, 제자를 위해 환자 앞에서 사직서를 던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의대 교수들, 정부 정책이 원점부터 틀렸다며 귀 막은 의사협회 모두 구토를 유발한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장은 22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정부가 2000명 원칙에서 물러난 게 아니다. 조삼모사(朝三暮四)다”라고 비판하면서 “개인적으로 의사를 오히려 좀 줄여야 된다는 입장이며, ‘한 명도 늘릴 수 없다’는 게 전공의·교수·의협의 공식 입장이다”라고 했다.

정부의 고심과 국민의 상처는 안중에 없이 전문가의 오만과 분노만 쏟아내고 있다. 주먹구구식 계산조차도 하지 않겠다면 ‘구구’는 빼고 주먹만 쥐겠다는 심산인가. 업(業)의 본질인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이익집단의 전형적인 폭력성이다.

정부가 민망함을 감수하며 출범시키려는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에도 의협은 불참한다는 입장이다. 이후의 과정 역시 주먹구구식으로 전개될 게 뻔해 보인다. 언제쯤 국민과 환자가 주먹구구단이나 주먹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떠나는 총리가 기왕 “열린 마음으로 어떤 주제든 열린 대화를 하겠다”는 약속을 던졌으니, 의료계는 속는 셈 치고라도 응하기 바란다. 정부의 주먹구구에 또 한 번 상처받더라도, 최근 환자들이 의사에게 받은 것만큼 깊은 상처는 아닐 테니 말이다.

김승현 사회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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