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섭의 이코노믹스] ELS·키코 사태, 소수 세력이 상호주관성 조작한 결과물
‘미인대회’와 ‘재귀성’으로 본 금융 시장
그러나 케인스의 미인 대회는 지금의 미인 대회와 완전히 다르다. 1930년대 영국 신문이 독자 서비스 차원에서 시행한 ‘미인 사진 뽑기 대회’를 말하는 것이다. 경품 받기를 원하는 독자는 100명의 미인 사진을 보고 최고 미인이라 생각하는 6명에게 표를 던진다. 미인 선발 방식이 독특하다. 심사위원이 아니라 참가자의 표가 결정한다. 참가자로부터 가장 많은 표를 받은 미인이 차례로 뽑히고 이 6명을 가장 근접하게 맞힌 사람이 경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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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관적 정보가 지각 필터 거쳐
주관적 현실 되며 오류 가능성
소수의 의도와 동조가 맞물리며
‘선행매매’와 조작 판칠 수 있어
거액 벌고도 처벌은 솜방망이
당국, 시장 질서 확립 노력해야
」
군중 심리, 상호주관성 따른 것
그러면 참가자는 어떻게 해야 경품을 받을 수 있나. 여기에는 미인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다. 만약 객관적 기준이 있다면 그에 따라 1~6등을 결정하면 되지 구태여 투표할 필요가 없다. 경제 분석에서 흔히 사용하는 ‘펀더멘털론’을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기가 주관적으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미인에게 투표해 봤자 별 볼일 없다. 카타르시스를 느낄지는 몰라도 당첨 가능성을 높이는 일은 아니다. 당첨되려면 다른 참가자가 누구에게 표를 많이 던질지를 추측해서 거기에 맞춰 투표하는 것이 최선이다. 철학 용어를 사용하자면 객관성도 주관성도 아닌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을 파악해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군중 심리를 따라 투자한다는 말도 상호주관성을 따른다는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통용되는 ‘수급이 재료에 우선한다’는 격언도 객관적 지표보다 상호주관성에 따르는 돈의 움직임이 주가를 더 많이 결정한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호주관성이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과정은 대단히 복잡하다. 케인스는 참가자들이 지금 누구를 미인이라고 평균적으로 생각하는지에 대한 추측을 넘어 누구를 미인이라고 평균적으로 예상하고 표를 던질지에 대한 2단계 추측, 2단계 추측에 대한 예상에 따라 새로운 추측을 하는 다음 단계 등으로 꼬리를 물며 추측이 확장될 수 있다고 지적하는 선에서 미인대회 언급을 마친다.
전설적인 헤지펀드 투자자이자 철학자인 조지 소로스는 이렇게 주관적이거나 상호주관적인 현실 인식이 복잡하게 얽혀 객관적 현실을 만들어내며 이를 또 변화시키는 과정을 ‘재귀성(再歸性·reflexivity)’으로 표현하고 케인스보다 구체적으로 시장 움직임을 설명한다(그림 참조). 시장에는 기업의 이익이나 주가 움직임, 환율 움직임, 거시 지표나 금융 정책 발표 등의 ‘객관적 현실’이 있다. 이러한 객관적 현실에 대한 ‘정보’는 ‘지각 기능’이라는 필터를 거쳐 각자의 ‘주관적 현실’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지각 기능은 한계가 있고 사람마다 관점도 다르기 때문에 객관적 현실을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현실 사이에는 항상 ‘오류 가능성(fallibility)’이 있다. 시장참가자는 동료와 토론하거나 언론에 생각을 흘려 대중이나 정부의 반응을 보는 방법 등에 의해 상호주관적 현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주관·객관적 현실 순환하는 시장
이들은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주관적 현실 인식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판단에 따라 돈을 벌겠다는 ‘의도’를 갖고 금융 상품을 매매하거나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시장의 객관적 현실을 변화시킨다. 소로스는 이것을 ‘조작 기능(manipulative function)’이라고 표현한다. ‘주가 조작’과 같이 적극적으로 시장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만 아니라, 시장 참가자의 행동에 따라 객관적 현실이 변하는 전체 과정을 포괄하는 말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동이 미치는 결과를 완벽히 예상할 수도 없고 실수도 있기 때문에 조작 기능에서도 오류 가능성을 회피할 수 없다. 소로스가 보는 금융 시장은 주관적 현실과 객관적 현실이 지각 기능과 조작 기능을 거쳐 재귀적으로 순환하는 곳이다.
케인스의 미인대회론도 소로스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다. 사진에 나온 미인들의 얼굴 모양이나 안색, 스타일 등은 객관적 현실이다. 참가자는 사진을 보고 누가 미인인지에 대한 주관적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경품을 받고 싶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표를 어떻게 던질지를 놓고 추측 게임을 한다. 경품 받을 확률을 높이기 위해 특정인에게 ‘몰표’를 던지자고 친구들과 협의할 수 있다. 의도를 갖고 투표한 행동에 따라 최고 미인 6명과 경품 당첨자가 결정된다. 이런 투표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금융 상품 매매처럼 지속해서 이뤄진다면 현실이 또 바뀐다. 이미 6명이 최고 미인으로 뽑힌 새로운 사실이 있고 이것이 100명 미인 사진에 더해져 변화된 객관적 현실이 생긴다. 이렇게 종합된 정보가 지각 기능의 필터를 거쳐 새로운 주관적 현실을 만든다. 이 주관적 현실을 놓고 “이번에는 내가 경품을 먹어야지” “이번에도 내가 경품을 따야지” 등의 의도를 갖고 다시 행동하고 최고 미인 6명과 당첨자가 다시 결정된다.
균형 분석은 과학적이지 않다
케인스와 소로스의 금융시장 분석은 여러 가지 함의를 준다. 그중 두 가지만 지적하자. 첫째, 흔히 사용하는 ‘균형 분석’은 전혀 과학적인 일이 아니다. 참가자들이 시장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반복되고 인식과 행동 과정에서 오류 가능성이 상존하는데 균형에 머무를 수 없다. 학계나 정책 당국은 ‘시장 균형 환율’이라는 잣대를 만들어 외환 시장 개입의 적정성을 따진다. 주식 시장에서도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 ‘내재 가치’나 ‘미래 가치’를 분석해 시세가 고평가 혹은 저평가됐다며 그걸 시정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참가자의 행동 때문에 가치가 계속 바뀌는데 균형 가격이나 적정 가격이라는 것을 향해 시장이 움직인다고 얘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일본 엔화 가치가 달러당 120엔대에 머물다 최근 150엔을 돌파하는 상황을 균형 환율로의 복귀나 이탈로 분석하기 어렵다. 한국 원화도 1970년대 초에 달러당 300원대였는데, 지금 1400원을 넘어서기도 한다. 이 움직임을 균형이라는 개념을 동원해 설명하기 어렵다. 여러 한국 기업의 주가가 장부 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수십 년째 지속하는데, 그것 또한 균형 개념으로 얘기할 수 없다.
그러나 ‘균형 환율’이나 ‘내재 가치’ 등을 내가 원하는 상호주관성을 만들어내는 도구로 사용할 수는 있다. 내가 의도하는 행동에 근접한 수치를 ‘균형’이라고 얘기하고 많은 사람이 동조한다면 시장이 그 가격을 향해 움직인다. 학계에서도 밀어주고 다른 사람이 반박하기 힘든 모델을 동원하면 바람잡이에 유리할 수 있다. 이것은 정책 당국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정책이 시장에서 먹히려면 당국도 원하는 상호주관성을 만들어내야 하고 그걸 받쳐주는 모델이 있으면 쓸모 있다.
둘째, 금융 시장에는 크고 작은 조작이 판을 친다고 생각하고 접근해야 한다. 조작만큼 돈 벌기 쉬운 방법이 없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추측에 추측을 거듭해서 ‘정답’을 내놓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대신 내가 상호주관성을 만들어낼 힘을 갖고 선행매매를 한 뒤 남들이 따라오게 하면 돈 버는 일이 ‘식은 죽 먹기’가 될 수 있다.
금융 시장, 조작이 판친다고 여겨야
소로스 본인이 이런 거래의 귀재다. 소로스는 영국 파운드화에 ‘쇼트(short)’를 대거 걸어 파운드를 방어하던 영란은행을 파산 지경으로 몰고 가며 10억 달러(약 1조 3000억원)를 벌었다. 유로화 통합이 진행되던 과정에서는 낙관론자의 상호주관성이 강했지만 1992년 유럽 경제가 불안해지자 비관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소로스는 회의론이 강했던 영국이 유럽통화제도(ERM)의 고정 환율을 고수하지 못하리라는 방향에 베팅했다. 영란은행이 이자율을 올리고 파운드를 매입하고 있었지만, 끝까지 방어하지 못할 것이라고 공개 석상에서 발언하는 등 선전전을 펼쳤다. 비관론자들의 상호주관성이 급격히 강해졌고 영국은 결국 ERM을 탈퇴하고 큰 돈을 손해봤다. 그리고 그것은 소로스의 이익이 됐다.
금융 시장에 조작이 판을 치고 있다면 금융 당국의 역할이 더 막중해진다. 그동안 금융 정책은 조작이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하고 제재하는데 관대했던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거액을 벌고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사례가 속출하고 은밀한 조작 세력이 계속 돈 버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 파생상품으로 문제된 주가연계증권(ELS)이나 키코(KIKO) 사태 등도 크게 보면 소수 세력이 상호주관성을 조작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 당국이 시장 질서를 잡는 데 더 강력하고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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