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모두가 같은 장면을 보고 웃음을 터뜨릴 때

이마루 2024. 4. 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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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을 보고 웃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만큼이나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기.
©unsplash
우리는 같은 장면을 보며 웃으니까
누구나 인생의 BGM을 몇 곡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내게는 밴드 R.E.M.의 ‘Shiny happy people’이 그중 하나다. 1991년에 발표된 이 노래의 후렴구에는 ‘Shiny happy people laughing, Shiny happy people holding hands’라는 가사가 반짝반짝, 행복하게 몇 번이고 화음과 포개진다. 한껏 차려입고 채로 외출한 사람들의 군락을 볼 때, 막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산책로를 열심히 걷는 이들을 볼 때, 내 머릿속에는 이 노래가 어김없이 울려 퍼진다. ‘인류애’가 샘솟는 순간이다.

얼마 전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몇 번이고 영화관을 찾을 때도 비슷한 애달픔과 애정을 느꼈다. 경직된 분위기의 언론 시사회, 온갖 연령대의 사람들로 가득한 주말 저녁, 조조 상영과 심야 상영, 어르신이 많았던 평일 오전…. 어느 시간대, 어떤 장소에서도 사람들은 똑같이, 특정한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세 번째 관람부터는 ‘사람들이 이번에도 웃으려나’ 하는 기대감으로 그 장면을 기다리고, 어김없이 터지는 웃음소리에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던 것 같다.

대체 왜 사람들은 비슷한 것을 아름답다거나 혹은 재미있다고 느낄까? 어째서 서로 닮은 평범한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낼까? 같은 장면에서 웃을 줄 아는데도 왜 어떤 때는 화해 불가능한 존재처럼 서로 물어뜯을까? 나 또한 사람들을 사랑하다가도 강렬하게 혐오하며 멸시한다.

©unsplash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의 대립이 다소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지금의 한국 정치 판세지만 그럼에도 보수여당 집권 시기에 야당이 이렇게 많은 의석을 차지한 것은 최초라고 한다. 총 300석의 의석 중 여당과 여당연합의 붉은색이 차지한 의석은 108석, 제1야당인 민주당과 민주연합의 푸른색이 차지한 의석은 175석으로 무려 283석에 달한다. 전체의 95%를 차지한 두 정당의 색깔 앞에 다른 색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당선 결과를 반영해 각 정당의 상징인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정당 판세를 표시한 지도를 보면 올해의 대한민국은 동(강원 · 영동 · 영남지방)과 서(수도권과 충청 · 호서 · 제주)로 양분된 것처럼 보인다. 경기도에 사는 한 후배는 “이제 외국인이 남과 북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보면 웨스트코스트에서 왔다고 해야겠어요”라며 농담을 건넸다. 그러다가 최종 결과만 반영한 것이 아닌, 정당 지지율을 반영한 전국 판세 지도를 봤다. 득표율에 따라 파란색은 하늘색, 붉은색은 연분홍색 정도까지 옅어진 구간도 있었다. 이 지도를 토대로 바라보면 야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고 여겨지는 서울 49개 선거구 중 푸른색이 선명한 선거구는 단 하나도 없다. 모든 선거구가 접전이었다는 의미다. 오히려 붉은색이 또렷한 선거구는 하나 있었으니, 68%의 지지율로 당선된 국민의힘 조은희 후보가 출마한 ‘서초갑’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붉은색으로 기록되긴 했지만 ‘경남 밀양·의령·함안·창녕군’ 후보로 출마했던 밀양 태생, 1996년생 더불어민주당 우서영 후보를 지지한 33% 경남 군민들의 마음도 그냥 잊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대체로 35~65% 내외의 공통분모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다름’보다 보편의 정서가 폭넓게 존재한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저주토끼〉로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정보라 작가의 근작은 평생 자리를 지켰던 시위 현장의 풍경과 연대의 필요성을 기록한 에세이 〈아무튼, 데모〉다. 연세대학교 시간강사였던 정보라 작가가 강사들의 처우 개선에 목소리를 높였던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예상보다 훨씬 단단하고 폭넓게 이어온 작가의 연대 범위와 지속되는 헌신에 책을 읽는 내내 감동했다. 황정은 작가 또한 첫 에세이 〈일기 日記〉를 통해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한 길고 조용한 투쟁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남’의 불행과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그 옆에 서는 이들은 이토록 끝없이 존재한다.

다시.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나눠진 지도에서 ‘보편성’에 대한 이야기는 일견 무력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가 확장해 나갈 수 있는 보편의 가능성을 잊지 않길. 안배된 아름다움을 마음 편히 즐기는 것만큼 타인의 불행에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 또한 당연할 수 있다면. 일단은 나부터 언제든지 동료 시민으로서 기꺼이 그 편에 설 것이다. 색 따위는 상관없이, 그냥 영화의 똑같은 장면에서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인간으로서.

이마루
〈엘르〉 피처 디렉터. 지방 도시 출신으로 수도권 중심에서 벗어난 넓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영상물, 책, 공연, 음악 모든 콘텐츠를 아끼고 즐기지만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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