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기업들 돈줄이 말라가고 있다 [김규환의 핸디 차이나]
상장 기업수 지난해 절반에도 못 미치는 30곳에 불과
지난 3월에만 中 기업 34곳 기업공개 신청 자진 철회
코로나19 이후에도 경기침체에 따른 증시여건 악화 탓
중국 기업들의 곳간이 텅 비어가고 있다. 3년여 전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던 중국 주식시장이 코로나19 엔데믹(유행병의 풍토병화) 이후에도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죽을 쑤는 바람에 증시를 통한 자금조달이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올들어 중국 상하이(上海)·선전(深圳)·베이징(北京) 주식시장의 기업공개(IPO·증시 상장)와 유상증자, 채권발행 등 직접금융 시장을 통해 중국 기업들이 조달한 자금은 역대 최저 수준으로 집계됐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지난 14일 미국시장조사기관 딜로직을 인용해 보도했다.
딜로직에 따르면 중국 기업들이 올들어 증시의 기업공개, 추가 주식발행, 전환주식 공모 등으로 조달한 자금 규모는 모두 64억 달러(약 8조 8500억원)로 집계됐다. 역대 최저치다. 중국 주식시장에 상장된 상위 300개 종목 주가를 종합한 CSI300 지수는 올해 5% 이상 상승했지만, 2021년 최고점을 찍었을 당시와 비교하면 40% 가까이 곤두박질친 상태다.
중국 증시의 올해 신주 발행 규모도 지난해 연말보다 83% 급감했다. 중국 국유 화학기업 중국화공(化工)그룹(ChemChina)이 인수한 스위스 농약·종자 업체 신젠타(Syngenta)그룹은 올해 상하이 증시 상장을 준비했으나 시장 상황이 여의치 않자 지난달 29일 IPO를 자진 철회했다.
신젠타는 "회사 발전전략과 글로벌 업계환경을 고려해 신중히 검토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며 "향후 적절한 시기에 증시 상장을 재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신젠타는 당초 기업공개를 통해 650억 위안(약 12조 4000억원)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어서 2010년 중국 농업은행 이후 13년 만에 중국 증시 최대 규모의 IPO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스위스 바젤에 본부를 둔 신젠타는 제초제와 농약 등 작물보호 부문에서 세계 1위, 종자 부문에서는 세계 3위로 꼽히는 세계 굴지의 기업이다. 중국화공그룹이 2017년 중국 기업 인수·합병(M&A)으로는 최대 규모인 430억 달러를 들여 인수했다. 신젠타는 이후 영국 런던증시 상장을 자진 폐지했다.
중국 증시에서는 지난달에만 34곳의 기업들이 기업공개 신청을 철회했디. 같은달 상하이와 선전 증시의 신규 증시 상장 신청건수는 ‘0건’이었다. 베이징 증시에 1건 접수된 게 전부다. IPO를 통한 자금조달액도 고작 59억 위안에 불과하다. 지난해 같은 기간 330억 위안의 5분의1 수준에도 못 미친다. 중국 기업들이 홍콩 등 역외시장에서 조달한 자금 규모도 16억 달러로 2003년 이후 가장 적다. 해외 M&A로 확보한 자금도 2005년 이후 최저 수준인 25억 달러에 그쳤다.
상황이 이런 만큼 올해 1분기 중국 증시에서 기업공개를 통한 자금조달액은 모두 236억 위안에 그쳤다. 중국 시장분석기관 터우중(投中)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같은 기간(651억 위안)보다 63.7%나 급감했다. 상장 기업수도 지난해(68곳)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30곳에 불과하다.
채권시장 상황도 마찬가지다. 국제 채권시장에서도 중국의 인기는 땅에 떨어졌다. 중국 기업과 은행, 정부가 해외에서 발행한 채권은 올들어 11일 기준으로 260억 달러 규모다. 지난해 같은 기간(240억 달러) 보다 조금 많지만 여전히 2021년의 절반도 안 되는 액수다. 2016년 이후 두 번째로 적은 수준이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이 끝나가던 2021년만 하더라도 중국 기업들은 해외 증시에서 조달한 금액이 610억 달러로 올해보다 39배 많았다고 FT는 지적했다. 당시 기업들이 해외에서 발행한 채권 역시 올해보다 4배나 많았다. 싱가포르 증권사 UOB 케이히안의 왕치 홍콩 법인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자신은 1990년대부터 금융가에서 일했다”며 "지금 중국에 대한 국제투자자들의 관심 수준은 지금까지 내 경력 가운데 최악"이라고 말했다.
중국 기업들의 자금조달에 애로를 겪고 있는 것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강력한 경제적 반등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FT는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지난해 5.2% 성장했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기대했던 만큼의 큰 반등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판국에 중국의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CPI)는 0.1% 상승에 그쳐 여전히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 압박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미·중 갈등 심화에 따른 다국적 기업들의 중국 이탈도 증시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더욱이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증감회)는 지난해부터 기업공개 및 증자를 억제하고 있는 데다 올들어 상장 기업의 질적 향상을 위해 IPO를 면밀하게 조사하고 증권범죄를 단속하겠다고 밝힌 점도 대형 악재다.
증감회는 지난해 8월 증시가 침체된 상황에서도 신규 상장과 증자를 억제해 기업공개 승인 속도를 조절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15일에는 상장회사의 질적 향상을 위해 주식시장 상장절차와 상장사 등에 대한 감독 강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책 문건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도 IPO를 면밀하게 조사하고 증권범죄를 강력하게 단속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실제로 중국은 증시가 침체됐던 2013년과 2015년에는 기업공개를 중단한 적이 있다. '차이나 쇼크'가 있었던 2015년에는 5개월 간 증시 상장을 완전히 중단하기도 했다. 다만 이번 IPO 억제 조치는 단계적으로 이뤄질 예정이다. 당국은 시장 상황을 보면서 상장 중단과 관련한 기업 규모와 기간을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는 이와 함께 자본시장 체질개선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중국 국무원이 자본시장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낸 것은 2004년, 2014년 이후 세번째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중국 국무원이 12일 공개한 증시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증시 상장 요건을 강화하고 부적절 기업은 시장에서 속히 퇴출시도록 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국무원은 가이드라인에서 "금융 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본시장의 기능과 역할을 충분히 활용할 것"이라며 "자본시장의 '고품질 발전'을 추구한다"고 강조했다. '고품질 발전'은 중국 당국이 주로 신(新)산업 분야 목표를 언급할 때 주로 쓰는 표현이다. 급속한 외연 팽창보다도 질적 성장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5년 내에 자본시장 체질개선을 위한 바탕을 마련하겠다는 일정도 제시했다. 2035년엔 '경쟁적이고 포용적인 자본시장'을 만들겠다는 게 국무원의 설명이다. 지난 수년 간 증시개편안을 추진해온 일본이 '역대급 증시 호황'을 누리고, 우리나라도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과 '좀비기업' 상장폐지 절차개선 등을 추진하는 가운데 중국도 증시 체질개선에 속도를 붙이는 모양새다.
중국의 이번 조치는 증권당국 수장을 갈아치운지 두 달만에 나왔다. 중국은 2월 증시가 5년 만에 최저치로 곤두박질치자 '규제 전문가'로 꼽히는 우칭(吳淸) 주석을 증감회 수장으로 앉혔다. 중국 당국이 증시에 본격 개입해 시장을 띄우려고 한다고 시장 전문가들은 해석했다.
상장사 일부를 솎아낼 수 있다는 방침도 공개했다. 증감회는 기업 상장시 영업이익과 순이익 요건을 기존보다 높이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IPO 심사 중인 기업과 IPO 주관사 등 관련 중개기관에 대한 현장 점검도 확대할 방침이다.
회계부정을 저지른 기업을 퇴출하는 상장폐지 규정도 공개했다. 대규모 분식회계 이후 홍콩서 청산 명령을 받은 부동산 개발업체 헝다(恒大)그룹, 미 나스닥에 상장했다가 회계부정이 발각돼 퇴출된 루이싱(瑞幸) 커피 등 사례가 이어져 투자자들이 중국 기업에 자금을 잘 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자 규제를 강화해 시장 신뢰도를 끌어올리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글/김규환 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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