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 남녀 후손끼리 또 불륜…무려 英 왕실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2024. 4. 2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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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불륜의 평행이론’

영국 국왕 찰스 3세는 ‘불륜’의 아이콘과 같은 군주다. ‘세기의 연인’이라 불리던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두고 카밀라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다이애나는 이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이했다. 찰스는 물론 전체 영국 왕실 인기까지 나락으로 떨어졌다.

찰스의 러브스토리에는 더 재밌는 얘깃거리가 숨어 있다. 시계태엽을 조금 앞으로 돌려본다.

증조할아버지 에드워드 7세에게도 내연녀가 있었다. 이름은 앨리스 케펠. 그녀는 카밀라의 외조모였다. 바람을 피운 상대방의 후손들이 또다시 바람을 피웠다는 웃지 못할 얘기. 영국 왕실을 뒤흔든 ‘불륜의 평행이론’이다.

대영제국의 전성기는 19세기 여왕 빅토리아 시대였다. 여왕에게는 아들인 왕세자 에드워드가 있었다. 그는 평생 남편 앨버트 대공만 바라보던 어머니 빅토리아와는 달랐다. 한 명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명의 여인을 탐닉하는 타입이었다. 미모의 부인이 있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이 부분부터 벌써 찰스와 꼭 닮았다.

에드워드가 결혼한 때는 1874년이다. 상대는 덴마크의 미녀 알렉산드리아. 에드워드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그러나 결코 한 여자로 만족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유부남의 몸으로 이 여자 저 여자를 닥치는 대로 만났다. 귀부인부터 창녀까지, 지위 고하도 가리지 않았다.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인 윈스턴 처칠의 어머니 레이디 랜돌프 처칠도 에드워드 7세의 잠자리 상대였다. 당대 모든 귀족들은 에드워드 앞에서 자신의 부인을 숨기기 바빴을 것이다. 부인 알렉산드리아의 속도 타들어갔다.

희대의 난봉꾼 에드워드…케펠에게 정착

알면서도 비켜준 케펠 남편…나이 차 27살

‘풍운아’ 같은 삶을 살던 에드워드에게 변화가 생겼다. 단순한 성관계 파트너를 너머 진심 어린 애정을 쏟은 여인이 생긴 것. 주인공은 앨리스 케펠. 아름다운 외모, 빛나는 지성과 더불어 ‘가벼운 도덕성’까지 갖춘 완벽한 여인이었다. 그녀 역시 남편이 버젓이 있는 유부녀였다.

케펠은 1891년 귀족 가문인 앨버말 백작 집안에 시집을 갔다. 그녀보다 4살 연상 군인인 조지 케펠과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런 정상적(?)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앨버말 가문의 가세가 기울어서였다. 돈은 없어도 럭셔리한 라이프스타일은 포기할 수 없었던 케펠 부인은 돈 많은 유부남을 애인으로 삼았다. 그들에게서 얻은 명성과 부를 통해 기울어진 가세를 다시 세우려는 목적이었다. 귀족 유부남이 잇따라 그녀에게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한 사내가 그녀를 주목했다. 계급의 최고봉이자, 최고의 바람둥이 에드워드 7세였다.

1898년 56세의 왕세자 에드워드가 29살의 케펠을 만났다. 에드워드는 젊고 예쁜 케펠에게 당연히 추파를 던졌고, 케펠은 당연히 받아들였다. 그녀가 꼬실 수 있는 최고의 사냥감이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는 그녀가 썩 맘에 들었다. 남편이 이미 있는 몸이니 결혼하자고 조를 리도 없을 테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그보다 27살이나 어린 여성 상대는 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다름없었다. 왕세자 에드워드는 단골집을 찾듯, 앨리스 케펠의 집을 방문했다. 에드워드가 찾아올 때, 남편은 시간에 맞춰 집을 비워줬다.

1901년 에드워드가 즉위하면서 케펠의 지위 역시 맞춰서 올라갔다. 다소 즉흥적이고 흥분을 잘하는 에드워드 옆에서 감정을 세심히 살피는 케펠의 역할 덕분에 에드워드 7세는 신하들과도 원활히 소통할 수 있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당시 인도 총독은 이렇게 말했다.

“국왕이 외무부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을 때, 케펠을 통해서 정책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에드워드의 케펠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 난봉꾼이던 그가 케펠을 만난 이후로는 지고지순한 남자로 변했기 때문이다. 의회민주주의의 틀 속에서 왕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도 케펠의 몫이었다. 영국 총리인 애스퀴스가 그녀의 역할에 감사를 표시할 정도였다. 세계 초강대국인 영국을 이끈 군주로서 에드워드 7세가 높이 평가받는 데 그녀가 어느 정도 일조한 셈이다. 물론 케펠도 얻은 것이 적잖았다. 케펠이 에드워드를 통해 얻은 이익은 현재 가치로 1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일러스트 : 강유나
찰스 3세에게 이어진 불륜의 DNA

에드워드 5세 불륜녀 ‘케펠’ 손주와 바람

1910년 색욕의 왕 에드워드가 승하했다. 에드워드의 장남 조지 5세와 그의 아내이자 새 왕후 테크의 메리(Mary De Teck)는 선대왕의 여인이 마뜩잖았다. 새 군주는 보다 보수적인 성향으로 가정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케펠은 궁정에서 짐을 싸야 했다. 영국 왕실의 궁전에는 ‘정부’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에드워드와 케펠은 모두 사라졌지만 ‘B(불륜)의 의지’는 계승된다. 찰스 3세가 주역이다.

1981년, 엘리자베스 2세의 아들이자 왕세자 찰스의 약혼식이 발표됐다. 귀족 여성이었던 다이애나 스펜서. 금발의 큰 키, 환한 미소가 아름다웠기에 전 세계가 그녀에게 환호했다. 아들 윌리엄과 해리를 낳으며 잉꼬부부의 전형처럼 살아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속은 곪아들어가고 있었다. 13살의 나이 차이, 잘 맞지 않는 성격까지 트러블이 계속된 것.

찰스는 가정의 불화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외부에서 풀었다. 과거 연인이었던 카밀라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한 여인이기도 했다. 결혼 4년 만인 1985년부터 두 사람의 불륜이 시작됐다. 에드워드의 자손과 케펠의 자손이 불륜에 빠졌다고 호사가들은 비아냥댔다.

카밀라 역시 유부녀인 건 마찬가지였다. 증조외할머니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더욱 황당하게도 카밀라의 남편 앤드류도 왕세자 찰스와 자기 부인과의 불륜을 승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시대는 더욱 도덕적으로 변해갔다.

언론에 의해 두 사람의 관계가 폭로되자 모든 사람이 찰스와 카밀라에게 분노했다. 금발의 왕세자비 다이애나를 아끼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다이애나는 평소 에이즈센터를 방문해 가난하고 아픈 사람을 보듬은 인성으로 유명했다. 다이애나도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들과 맞바람을 피웠지만, 아무도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비극’이 일어났다. 다이애나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이다. 다이애나가 사망한 지 9년째 되는 해 찰스는 카밀라와 공식적으로 혼인했다. 영국 왕실 지지율이 가장 낮게 떨어진 계기였다.

호랑이는 호랑이를 낳는다지만, 바람둥이의 아들들은 바람둥이가 아니었나 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다. 에드워드와 찰스, 두 사람의 아들 모두 전형적 모범 가정을 보여주고 있다. 엄마를 버린 아버지의 모습에서 타산지석을 삼은 것이었을까.

에드워드 7세의 아들 부부 조지 5세와 메리, 그리고 찰스 3세의 아들 부부 윌리엄 왕세자와 캐서린 미들턴은 잉꼬부부의 전형이다. 바람둥이의 아들들마저 100년의 시차를 두고 똑 닮은 평행이론이 있었던 셈. 또 다른 한 세기 후 영국 왕실은 어떤 모습일지. 치정은 언제나 역사의 맛을 돋우는 소금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5호 (2024.04.17~2024.04.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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