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회의장 폭파하려 한 독립투사 국회의원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4·19 혁명 당시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현수막을 든 시위대 |
ⓒ 문화재청 |
한국전쟁 중인 1952년 6월 25일, 부산 충무로광장 '6·25사변 2주년 기념식' 때 독립운동가 유시태(류시태, 1890년생)가 이승만에게 권총을 발사했다가 불발한 일이 있다. 유시태에게 이 거사를 제안한 인물이 1883년생 국회의원 김시현이다. 김시현은 자신의 지위를 활용해 유시태가 연단 귀빈석에 앉게 만들었다.
77세의 김시현이 석방된 날, 70세의 유시태도 옥문을 열고 나왔다. 29일 자 <동아일보> 기사 '정치범들 석방'에 따르면, 전주형무소를 나온 유시태는 "그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원통하다"고 한 뒤 "학생들의 피의 투쟁으로 독재정권을 타도한 것을 살아서 보게 되었으니 당장 죽어도 한이 없다"고 소감을 밝혔다.
법무부가 이들을 서둘러 석방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 있다. 그날 오후 2시에 나온 유시태는 감격적인 소감을 기자에게 밝혔다. 그런데 그는 그 감격을 발걸음으로 옮길 수 없었다. 집에 갈 차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 기사는 "그런데 유씨는 고향인 군위까지 갈 여비가 없어 시내 한성여관에 투숙하면서 장남 장하(45) 씨가 올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석방 절차가 급히 진행돼 가족들에게 일찍 연락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승만을 죽이려 했던 두 사람을 법무부가 이처럼 신속히 풀어준 것은 이승만의 정치가 잘못됐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기에 가능했다.
저격 사건 58일 만인 1952년 8월 22일, 김시현은 부슬비가 내리는 부산지방법원에서 제1회 공판을 받았다.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에 따르면, 행위 동기를 묻는 질문에 그는 "이 대통령은 독재자이며 정실인사를 자행할 뿐더러 민생 문제를 해결할 역량이 없다", "동란이 발발하자 이 대통령은 그 이튿날인 6월 26일 독차(獨車)를 타고 도망가버리고", "방위군 사건이며 거창 사건 등으로 민족 만대의 역적이 된 신성모를 죽이기는커녕 도리어 주일대사까지 시켰으니 그런 대통령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등등의 심경을 밝혔다.
그냥 독재자가 아니라, 무능하고 무책임하며 정실인사까지 일삼는 독재자였다. 거기다가 무고한 국민들을 대거 희생시키고 민간인을 마구 학살한 사건의 장본인을 주일대사로 빼돌린 독재자였다. 그런 인물을 그냥 둘 수 없었다는 게 김시현의 법정 진술이다.
▲ 독립운동가 김시현 |
ⓒ 자료사진 |
그러면서 "반면에 친일 행적이 있는 자들을 권력의 요직에 기용하는 등 친일세력과 손을 잡고 있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기술한다. 그런 김시현의 내면을 보여주는 일화가 1989년 12월 1일 자 <한겨레>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제8회 김시현 편에 실려 있다.
"아들 봉년 씨는 김시현이 김구 암살 당시 신문을 보며 '이것은 분명히 이승만의 짓이다. 함께 고생하며 독립운동을 한 처지에 정적이라고 죽이다니 그냥 놔두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 김구 암살(1949.6.26) 직후의 일화
"당시 김시현의 수행원으로 사건 당일 새벽에 현장답사까지 동행했던 권오상(63) 씨는 김시현이 '민족을 버리고 간 놈이 무슨 대통령이냐, 역적이지. 죽여버리겠다'고 말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 이승만 암살미수(1952.6.25) 당시의 일화
두 사람의 증언에서 느껴지듯이 김시현은 항일투쟁에 대해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었다. 이런 기질이 1919년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55년에 발행한 항일투쟁기인 <기려수필>은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김시현이 "기미년 봄에 독립만세가 크게 일어나자 동포들의 실정을 보고 싶어 5월에 길림성을 지나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고 그해 10월에야 귀국했다"고 서술한다.
1898년 생인 의열단장 김원봉은 김시현의 조카뻘이었다. 김시현의 항일투쟁은 '조카'가 이끄는 의열단의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2016년 영화 <밀정>에서 배우 공유의 연기로도 묘사됐듯이, 김시현은 각종 무장투쟁의 지휘 및 자금 조달 등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위 <한겨레> 특집 기사는 그가 '한국 최후의 레지스탕스'로 불렸다면서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1920), 오성륜·김익상의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저격 사건(1922), 김지섭의 도쿄 이중교 폭파 사건(1924) 등 숱한 테러 사건의 배후에는 언제나 김시현이 있었"다고 서술한다.
그는 이 같은 열혈 독립운동으로 인해 긴 시간을 답답한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김시현의 체포·투옥 경력을 중요한 것만 간추려 보아도 1919년 상주헌병대 체포 및 탈주, 1920년 체포, 대구형무소 1년 복역, 1923년 체포, 안동·대구 형무소 등 10년 복역, 1933년 베이징에서 체포, 일본 나가사키형무소 5년 복역, 1943년 체포, 베이징 일본영사관 구치감, 경성헌병대 1년여 복역, 1944년 체포, 경성헌병대에서 45년 8월 15일 출감 등 파란만장하기만 했다"고 위 기사는 말한다. 일제하에서 도합 18년 7개월을 감옥에서 살았던 것이다.
▲ 경북 예천군에 자리한 독립운동가 김시현의 묘 |
ⓒ 김종훈 |
<기려수필>에 적힌 그의 호는 학우(鶴右)다. 경북 안동 학가산 우측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호는 하구(何求)가 됐다. 위 기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김시현이 워낙 감옥에 들랑거리는 데 기가 질린 당시 총독 사이토(원문은 가이토)가 그 정도 했으면 됐지 도대체 '무엇을 구하러'(何求) 이 짓을 계속하느냐며 '차라리 호를 하구로 고치라'(학우와 하구는 일본어 발음이 같다)고 한 것이 그 뒤 하구로 굳어졌다는 게 봉년 씨의 설명이다."
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하느냐는 의미로 호가 바뀌었다는 설명이 있을 정도로 김시현은 지칠 줄 모르고 항일투쟁에 매달렸다. 그렇게 살았던 그의 눈에는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친일청산을 훼방하며 독재와 민간인 학살까지 일삼는 이승만이 가당치도 않는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세상을 살리고자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이다.
위 기사에 따르면, 이종률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가 정리한 김시현 회고록 원고에 김시현과 유시태의 대화 장면이 나온다. 회고록 속의 김시현은 이승만을 그냥 두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거라며 "한번도 진실한 애국자가 되어 본 일이 없는 그이니 이번에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음으로써 비로소 한번 애국자 노릇을 하라고 하지"라고 말한다. 이승만이 한번 쯤은 옳은 일을 하도록 해보자며 거사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일제하에서 18년 7개월간 투옥됐던 김시현은 이승만 암살미수로 감옥에서 8년을 더 살았다. 그런 뒤 1960년 4월에 석방돼 그해 7월 제5대 총선에서 당선했다. 안동 사람들이 그를 한 번 더 선택해 준 결과다. 국가보훈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지만, 안동 주민들은 그에게 두 번이나 금배지를 달아줬다.
김시현은 국회의원 지위를 활용해 유시태를 귀빈석에 앉혔다. 비슷한 시도가 재선 의원 때도 있었다. 70대 후반인 그 자신이 의원 지위를 활용해 국무회의장에 침투하는 방법을 생각했던 것이다. 위 기사에 따르면, 이에 관한 최측근 박진목의 증언이 있었다.
"4·19 혁명과 함께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김시현은 그 뒤에도 평생을 걸어온 테러리스트의 고집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박진목 씨에 따르면, 한번은 제5대 국회의원이었던 김씨가 찾아와 '1천만 원만 마련해주게. 온 친일파가 장면 정권 밑에 다 모였는데, 내가 국회의원 신분을 이용해 국무회의 하는 데 들어가 폭탄 하나 터트리면 친일파가 깨끗이 종말을 고할 것 아닌가'라며 친일파 제거의 끈질긴 집념을 보였다는 것이다."
김시현의 의원 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5월 16일, 선글라스 쓴 군인이 5·16 쿠데타를 일으켜 국회가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66년, 김시현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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