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로 남았던 홍세화 선생이 떠난 그 자리

김건수 2024. 4. 2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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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글] 언제나 현실과 긴장 유지하며 실천하는 삶 살아온 '전사'

[김건수 기자]

 고 홍세화 선생. 사진은 2023년 11월 7일 노동당과 인터뷰 하는 모습.
ⓒ 김건수
흑백논리 지배하던 한국사회에 '관용'을 일깨우다 - <경향신문>
'똘레랑스' 일깨운 홍세화 별세…마지막 당부 '성장에서 성숙으로' - <한겨레>

언론인, 지식인, 관용을 뜻하는 '똘레랑스'로 이름을 알린 스테디셀러 작가, 진보신당과 노동당에 소속된 정당인 그리고 남민전의 '전사'. 지난 18일 별세한 홍세화 선생의 이력을 한 단어로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홍세화 선생을 그저 '똘레랑스의 전도사', '똘레랑스의 대명사'로는 기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홍세화 선생은 생전 칼럼에서 "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자보다 더 잘못한다"면서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소유주의-에 순응하며 기득권이 되어버린 옛 진보좌파를 향한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생의 마지막 즈음 홍세화 선생은 '관용의 전도사'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할 반란을 선동하는 '전사'에 가까웠다.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 말할 수 있는 것도 특권에 속하는데, 적잖은 입이 말로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삶은 신자유주의를 산다. 대부분은 부자이기도 하다." - '홍세화 칼럼' 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1월 12일 자 <한겨레>)

세상에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이념도, 진보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대가 바뀌고, 시대가 바뀌니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도 바뀐다. 과거 변혁의 별을 가슴에 품던 이들이 이제는 과거를 팔아 국회로 시민사회로 입성하며 기득권이 되었다. 가슴에 품었던 변혁의 별을 버리고, 그 대신 금배지를 달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치인이 된 과거의 '운동권'들은 문재인 정권 당시 180석의 의석을 가지고도 노란봉투법 하나 제정하지 못했지만, 민주주의의 이름을 빌려 입법·사법·행정 권력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검찰 권력의 패권을 획득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었다.

압도적인 의회 의석을 확보하고 집권했음에도 노동자, 여성과 장애인, 소수자에게 닥친 현안은 뒤로 밀려났다. 선생은 이를 두고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며 일침을 가했다.

선생의 통렬한 비판의 근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소유주의를 향한 전향"에 나서 기득권이 된 과거의 동지들을 향한 증오였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 당부'를 고하며 마친 <한겨레> 칼럼을 비롯해 선생이 남긴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선생은 윤석열 정권과 문재인 정권을 모두 비판할 만큼 단호했고, 지면을 빌려준 신문사를 비판하는 말을 빼놓지 않을 만큼 불온한 서생의 삐딱한 눈길을 거두지 않았지만 특정 집단과 개인을 증오하진 않았다.

대신 기득권 정치가 외면하고 있는 투쟁의 현장을 소개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청년 노동자 김용균의 이야기, 0.3평에 스스로를 가둔 거제조선소 하청노동자 유최안의 이야기, 국회 앞에서 곡기를 끊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농성장 소식과 변희수의 죽음이 선생이 남긴 글의 주제였다.

즐거운 아웃사이더로 가장자리의 삶 살았던 '전사'

이 글을 쓰는 나는 노동당 당원이다. 노동당은 한국 제도권 정당에서 유일하게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정당이다. 그런데 모두가 알다시피 이번 총선에서 노동당뿐만 아니라 진보정당은 그야말로 참패를 겪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진보정당 운동의 한 시대가 마무리되었다고 말한다. 민주노동당부터 시작해 온 진보 정치의 한 세월이 끝나는 장면을 지켜보며 진보정당 운동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존재 이유를 찾아야만 하는 고독한 실존적 고뇌에 빠졌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 운동 실패의 원인을 두고 국회에 입성한 몇몇 진보 정치인을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진보정당 운동이 대변하고자 했던 '노동자 민중'은 더 이상 균일하지도, 저항의 주체로서 집단적 의식을 공유하지도 않는 것 같다.

홍세화 선생은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강연자로 초청받은 일화를 소개하며 "노조 간부들은 주식투자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300여 조합원 앞에서 나는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라고 한탄했다. 그가 그토록 통렬히 비판했던 소유주의에 늪에 빠진 것은 비단 기득권 세력만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홍세화 선생은 좌파 운동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 않았다. 선생은 노동당이 유일하게 배출한 지역구 후보가 지지율이 높지 않아 여론조사에도 포함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웠던 듯하다. 마지막으로 <한겨레>에 청탁한 기사가 바로 노동당 지역구 후보 이장우 후보에 관한 인터뷰였다.

그 덕에 이장우 후보와 함께 노동당 비례 1번 남한나 후보의 인터뷰도 <한겨레21>에 실릴 수 있었다. 남한나 후보는 건설노동자로, 윤석열 정권 탄압에 맞서기 위해 노동당 비례후보로 출마했다. 홍세화 선생은 생전 마지막 <한겨레> 인터뷰를 통해 "사전투표에서 노동당을 꼭 찍어주고 왔다"고 밝혔다.

언론인, 지식인, 관용을 뜻하는 '똘레랑스'로 이름을 알린 스테디셀러 작가, 진보신당과 노동당에 소속된 정당인 그리고 남민전의 '전사'. 그가 자신을 전사로 이끌었던 전태일 열사 곁으로 간다. 영원한 안식을 뒤로하고, 전사들의 함성이 왕왕 울리는 전사들의 고향 마석 모란공원에 묻힌다.

그의 삶과 죽음을 보고 있노라니 홍세화 선생은 세상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가 방관하는 비평가나 지식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미래를 예견하는 선지자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홍세화 선생은 언제나 현실과 긴장을 유지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온 '전사'였다.

"나는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 - 홍세화

좌파 운동의 큰 어른이 가셨다고,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한탄하면 과연 홍세화 선생께서 좋아하실까. 홍세화 선생은 시대의 어른도, 좌파 운동의 대부 같은 것도 자처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로 가장자리의 삶을 살았던 '전사'였고, 그중에서도 전선의 앞자리에서 폭탄 같은 말들로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선동하는 '척탄병'이었다.

총선이 남긴 쓰라린 아픔도, 선생이 떠나 헛헛한 마음도 모르는 듯 어느새 대지는 초록의 이파리가 무성한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선생이 떠난 그 자리, 다른 척탄병들을 만나길 고대하며 다시 새로운 시대를 도모할 수밖에. '전사' 홍세화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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