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재난'은 언제 시작되는가?

정세권 2024. 4. 2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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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오래된, 더 넓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

[정세권]

얼마 전 미국 연구진이 인체에 무해한 원자외선(far-UVC) 램프로 실내 공기 중의 바이러스 99%를 제거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기존 살균 자외선보다 파장이 더 짧은 원자외선으로 실내 공기의 병원체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원자외선은 사람의 피부나 눈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병실이나 사무실 혹은 집안에 사람이 있어도 사용할 수 있어서 더욱 실용적일 것이라고 평가받았다.

그렇지만 실내 환경을 깨끗하게 혹은 쾌적하게 만들어줄 새로운 과학기술은 더이상 열렬한 환호를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획기적이라 하더라도 이미 우리 주변에는 비슷한 역할을 하는 수많은 제품이 있기 때문이다. 공기 청정, 습도조절, 살균 기능까지 갖춘 가전제품부터 나노물질과 음이온을 함유한 각종 화학제품이 집안 곳곳을 닦고 쓸고 있으며, 항균 마스크는 미세먼지와 황사를 막는 데 필수적이다.

코로나19 대유행 기간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하루종일 손소독제를 뿌리고 바르고 비비고 말리곤 했던 모습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일상의 힘겨운 연장이었다. 원자외선이 기존 살균 자외선보다 아무리 우수하다고 하더라도, 이미 차고 넘치는 것에 추가되는 과학기술일 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새로운 원자외선 램프에 크게 환호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그런 과학기술이 가져온 참사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 끝나지 않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바로 대표적이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 가습기 살균제 피해 지원센터에 따르면, 2024년 3월 말 기준 7923명이 피해 신고를 했고, 그중 1852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지난 6일 또 한 명의 피해자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사용하다가 천식과 만성폐쇄성폐질환(COPD)을 앓았다고 한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이 공식적으로 알려지고 2013년부터 피해 신고가 시작된 이래 10여 년의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수많은 피해자와 사망자가 나왔고, 앞으로 얼마나 더 나올지는 예측할 수도 없다. 가정과 사무실을 쾌적하게 만들어줄 가습기와 그 내부를 살균해주는 화학제품은, 원래의 기대와 달리 우리의 건강과 삶을 위협했다. 우리가 새로운 원자외선 램프를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이유이다.

'느린 재난'으로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

최근 환경사회학자 박진영은 '느린 재난'(slow disaster)으로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분석했다. 느린 재난이란, "재난을 단 하나의 사건, 쪼개진 사건으로 보는 대신 사건 발생 전 켜켜이 쌓인 과거부터 사건의 여파가 미칠 먼 미래까지 장기적인 과정으로 인식하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기존 관점이 재난을 사건이 발생한 찰나의 폭발적인 이미지로 인지한다면, 그러한 순간 앞뒤로 시간을 늘리고 사건의 영향을 받는 공간을 넓혀 재난의 인식과 상상 범위를 조정하는 것이다."(박진영 <재난에 맞서는 과학>, 30쪽)

이런 맥락에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1853명의 사망자가 나온 2024년 4월보다 더 과거로, 그리고 훨씬 미래로 시간을 늘려 살펴봐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다룬 많은 논문과 보고서에서 참사의 시작은 살균제 첫 제품이 출시되었던 1994년으로 그려진다. 그해 11월 유공이 세계 최초의 가습기 살균제 '가습기메이트'를 출시했고, 곧이어 옥시, 애경, LG생활건강 등이 신제품을 시장에 내놓았다. 뒤이어 여러 대형마트에서 자사 상표(PB) 제품을 선보이면서 가습기 살균제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2006년 그리고 2011년 원인을 알 수 없는 폐렴 증상을 보인 어린이와 산모들이 서울아산병원과 서울대병원에 입원했고, 질병관리본부의 역학조사와 결과발표, 가습기 살균제 사용중단 권고가 내려지면서 이 참사는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참사의 원인을 찾고 책임을 규명하는 데, 그리고 피해 현황을 파악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데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수많은 피해자가 확인되었고 수없는 죽음이 있었다.

그렇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피해와 죽음이 더해질지 가늠할 수 없다. 느린 재난이라는 렌즈가 "사건이 벌어진 이후 길게 뻗어 다시 보도록"(32쪽) 한다면,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현재 진행 중이면서도 동시에 미래의 우리 일상을 바꿀 수 있는 재난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가정위생 상품의 범람, 그리고 가습기

느린 재난이 먼 미래까지 여파를 미친다면, 그 시작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볼 수는 없을까? 다시 말해 1994년 처음 살균제 제품이 출시되던 이전에, '가습기'라는 제품은 언제부터 그리고 왜 사용하게 되었을까?

정확히 '최초'라는 단어를 쓰려면 더 촘촘하게 살펴봐야겠지만, 오래된 신문 기사를 들여다보면 '가습기'가 처음 광고, 보도된 것은 1970년대 초반이다. 1971년 영성기업사가 '급습기'라는 이름의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수년 뒤에 여러 종류의 급습기가 판매되기 시작했다(<조선일보>, 1972. 12. 10. "급습기").

1973년에는 '전기난로에 부착된 가습기'가 간단히 언급되기도 했으며(<조선일보>, 1973. 11. 17. "전열기 사용, 옥내배선 안전지침"), 가습기만 따로 다룬 것은 1975년 실내 난로나 난방시설에 부착해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에 대한 기사였다(<경향신문>, 1975. 11. 5. "가습기"). 이에 따르면, 가습기 자체에는 발열 장치가 없지만 난로의 열을 이용하여 가습기 물통의 물을 데우고 수증기를 내뿜는 원리였다. 1년 여쯤 지나고 나면 대한전선, 금성사, 삼성전자 등에서 자체적으로 가습기를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전원을 연결해서 사용하는 초음파 가습기가 출시되었다.

당시 가습기는 공기가 건조해지기 쉬운 계절에 방안이나 거실 등 실내의 습도를 조절하고 공기를 정화해주는 것으로 홍보되었다. 특히 겨울철에 피부 건조, 감기, 기관지염에 걸리기 쉬운 어린이들 방에 놓아두면 호흡기질환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난로 위에 끓는 물을 올려두거나 젖은 수건을 말리는 것만큼 효과가 좋다고 홍보된 가습기는, 진공청소기와 함께 "실내의 공해"를 제거해주는 상품으로 묘사되었다.

진공청소기가 "난방된 실내의 온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구석구석까지 미세한 먼지를 말끔하게 제거할 수" 있다면, 가습기는 적당한 습도 유지를 도와주어 "난방으로 인해 실내의 습도가 부족하게 되면 미세한 먼지가 목이나 코의 점막을 자극하여 각종 기관지염을 유발시키는" 것을 막아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 가정 환경을 더 깨끗하고 쾌적하게 만들어주는 가습기는 당시 1만 원대 중반부터 2만 원대 후반 가격으로 판매되었다(1980년대 초 소주는 200원, 라면이 100원이었다).

가습기가 출시, 판매되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은 가정위생에 대한 관심이 제법 높았던 시기였다. 과일이나 채소에 묻어 있을 기생충이나 식기의 기름 찌꺼기를 씻어낼 수 있는 주방용 합성세제 '트리오', 그리고 옷감을 상하지 않고도 묵은 때를 말끔히 없애 주는 세탁세제 '크린엎'과 '써니'가 사용된 지도 이미 10여 년이 지난 때였다(이들 세제는 모두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의 제품이었다). 화학섬유로 만든 의류가 피부와 건강 전체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료공해(衣料公害)' 및 식수로 사용되는 수돗물의 오염에 대한 우려도 1970년대 초부터 등장했다.

특히 1970년 외국에서 생산된 정수기가 홍보되기 시작했고 국내에 여러 발명가가 자체적인 정수기를 개발, 특허를 출원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불량한 정수기를 초등학교에 공급한 업자와 이를 묵인한 공무원이 구속되었다거나, 가정에서 쓸 수 있을 정도의 소형정수기가 생산, 판매되기 시작했다는 기사들도 등장했다. 가습기나 진공청소기가 출시되었던 1976년에는 유한양행이 가정의 식품과 의류, 주방용품뿐 아니라 집안 곳곳을 청소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코락스'와 '베이비락스'라는 살균소독제를 내놓았다.

실내 공기를 깨끗하게 만드는 가전도 비슷한 시기에 선보였다. 1975년 대원화학이 실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기세정장치'를 개발, 특허를 취득한 데 이어, 이듬해 삼성전자는 "10만분의 1mm의 미세한 먼지와 세균까지 흡수"할 수 있는 공기청정기를 개발하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공기를 깨끗하게 해주는 가전인 공기청정기 광고는 "실내의 오염된 공기를 신선하게 바꾸어" 가습기나 진공청소기처럼 "건강환경"을 만드는 제품이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공기청정기는 "공기의 비타민인 음이온"을 대량으로 발생시켜 "청량감을 줄 뿐만 아니라 피로를 씻어" 주는 기능도 있다고 홍보되었다.

가정을 더 청결하고 위생적으로 만드는 가전과 생활용품들이 속속 출시되던 즈음 가습기도 그중 하나로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가습기의 목적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말해 물을 자주 갈아주지 않아 세균이 번식하고 건강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살균제가 출시되었다. 1994년 처음 판매된 가습기 살균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가정위생을 지키려고 생산된 상품 목록에 추가된 또 하나의 상품이었다. 그렇다면 느린 재난으로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시작을 1994년 이전까지 확장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가정환경의 상업화 – 더 오래된, 더 넓은 '느린 재난'?

미국 역사학자 낸시 톰즈(Nancy Tomes)는 <세균의 복음>이라는 책에서 20세기 초 세균을 피하고 없애기 위한 미국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바 있다. 19세기 말 세균학의 발달로 질병의 원인인 세균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기존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바꾸면서 세균과의 전쟁을 치뤘던 미국의 모습은 지금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화장실의 백자 변기와 살균제, 호텔의 일회용품, 매트리스와 베개의 하얀 커버, 세균이 득실대는 남성의 긴 수염을 말끔히 깎기 위한 질레트 면도기, 진공청소기와 항균비누 등등.

톰즈는 '세균이 질병을 낳기에 일상 속의 다양한 예방 행위들로 이 세균을 피할 수 있다'는 일종의 종교적 '복음'이 당시 미국을 휩쓸었고, 그 가운데 수많은 위생상품이 판매, 소비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20세기 중후반 최신의 공중보건 조치, 백신, 항균제, 각종 상품으로 세균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던 즈음에, 에이즈의 유행은 세균 혹은 병원체에 대한 또 다른 공포를 낳았다. 그리고 "새로운 '세균의 복음'이라는 현대 십자군"(20쪽)이 다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20세기 초 미국의 상황을 1970년대 한국 사회와 연결하거나 투영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1960년대 이후 공장 굴뚝의 연기와 자동차 매연으로 인한 공해를 심각하게 우려하던 인식들은 가정환경에 대해서도 '실내공해'(室內公害)라는 측면에서 바로보기 시작했다. 따라서 집안을 청결하고 쾌적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 그리고 이를 위해 소비된 수많은 가전과 화학제품이 등장했고, 그중 하나가 가습기 그리고 1994년 가습기 살균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1994년에 시작된, 그리고 2011년 세상에 드러난 '단 하나의, 쪼개진 사건'으로 볼 수는 없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세균학이 발달하고 '세균의 복음'이 퍼졌던 백여 년 전부터 시작된, 그리고 가정을 위생적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던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느린 재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많은 피해자를 찾고 구제하는, 너무도 기본적이지만 너무도 쉽지 않은 노력과 함께, 여전히 진행 중인 '느린 재난'을 어떻게 멈출지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 참고자료
"미처 몰랐던 衣料公害", 『매일경제』, 1970. 6. 6.
"급습기", 『조선일보』, 1972. 12. 10.
"전열기 사용, 옥내배산 안전지침", 『조선일보』, 1973. 11. 17.
"가습기", 『경향신문』, 1975. 11. 5.
"자동으로 조절 전기 가습기", 『경향신문』, 1976. 10. 13.
"업계, 가습기 수요 급증", 『매일경제』, 1976. 11. 22.
"따뜻한 겨울을 나려면", 『동아일보』, 1977. 11. 8.
"원자외선, 실내 공기 중 바이러스 99% 제거.. 인체엔 무해", 『연합뉴스』, 2024. 4. 3.
"1,853번째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의 죽음", 『환경보건시민센터 보도자료』, 2024. 4. 17.
박진영, 『재난에 맞서는 과학』 (민음사, 2023).
낸시 톰즈 지음, 이춘입 옮김, 『세균의 복음 – 1870~1930년 미국 공중보건의 역사』 (푸른역사, 2019)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세권은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양 과학기술의 역사 특히 미국 의료의 역사를 공부했고 최근에는 한국 의료의 역사도 연구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대외정책과 공중보건의 관계 및 한국에 미친 영향, 1960년대 이후 한국 의료의 전문화 및 상업화, 의료기술의 역사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면역국가의 탄생 – 20세기 미국의 백신접종 논쟁사>(2024), <본성과 양육이라는 신기루>(2013) 등 다수의 번역서와 <질병과 함께 걷다>(2024), <첨단기술시대의 의료와 인간>(2024), <새로운 의료, 새로운 환자>(2023), <환자란 무엇인가>(2023) 등 공저서를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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