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 부씨입니다"... 믿기 힘든 어느 프랑스인 이야기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이길상 2024. 4. 2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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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양탕국'이라는 단어의 유래

[이길상 기자]

1976년은 중국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한 해다. 반세기 가깝게 중국 공산당을 이끌어온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이해에 세상을 떠났고, 1966년부터 10년간 중국의 모든 문화적 유산과 지적 전통을 파괴하였던 이른바 문화혁명이 이해에 막을 내렸다.

덩샤오핑이 주도하는 개혁 개방의 문이 열리면서 아시아의 정치 지형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통일 베트남에는 사회주의공화국이 이해에 탄생했고, 일본의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가 록히드사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국제 정치에서의 이런 격동보다 큰 경제 부문의 변화를 상징하는 한 기업이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등장한 것도 1976년이었다. 스티브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 주도로 창립된 애플컴퓨터주식회사다. 애플의 창립은 20세기 말과 21세기를 관통하는 문명의 대전환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양탕국'
 
  '양탕국'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 신문에 처음 등장한 1968년 12월 26일자 <조선일보> 6면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우리나라는 유신체제의 정점을 맞아 대학생과 지식인, 그리고 노동자들의 체제 저항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포항 영일만에서 석유를 발견했다고 밝힘으로써 국민 모두를 흥분시켰고, 8월에는 레슬링 선수 양정모가 몬트리올올림픽에서 한국인으로는 올림픽 출전 역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는 소식 또한 전국을 뒤흔들었지만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를 지향한 시민 사회의 염원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민주화에 대한 염원과 저항 운동에도 불구하고 이해 5월 25일에 열렸던 야당 신민당의 전당대회는 이른바 '각목 난동 사건'으로 얼룩져 시민들의 실망감은 커져만 갔다. 이런 혼란이 지속되던 8월 18일 북한은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6.25 전쟁 이후 최초로 남과 북, 그리고 주한 미군이 준전시체제에 돌입할 정도로 한반도의 긴장이 높아졌다.

긴장과 혼란 속에서 커피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여전히 차가웠다. 커피 관련 보도는 양적으로도 최하 수준이었고, 질적으로도 최저였다. 읽을 만한 소식이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등 4개 일간지에 1년간 실린 커피 관련 기사는 148건에 불과하였고, 이 중 131건이 <조선일보>에 게재되었다.

<조선일보>에 게재된 기사 중에는 '양탕국'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커피라는 낯선 음료가 우리 땅에 들어온 초창기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표기되었다. 갑비자, 가배차, 가배, 가비차, 카피차 등이 사용되다가 일제 강점기 중반부터는 커피라는 용어가 일상화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이름 하나가 커피의 별칭으로 사용되었었다는 이야기가 언제부터인가 등장하였다.

서양에서 전해진 탕국이라는 의미의 '양탕국'이 그것이다. 지금은 커피 역사를 다루는 이런저런 글에, 커피전문점의 상호에, 심지어는 커피인문학 저술이나 논문에도 당연한 듯 인용되고 있다. 근거가 있는 용어일까?

'양탕국'이라는 단어는 개화기로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 1968년까지 발행된 우리나라 고신문과 근대 신문 99종 그 어디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다. '양탕국'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 신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68년 12월 26일이다. 이날 나온 <조선일보> 6면의 특별연재 '개화백경' 58번째 연재물 '차'였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10년 전후 서울 세종로 중부소방서 뒤편에는 부래상(富來祥)이라고 하는 프랑스 사람이 나무시장을 벌이고 있었다. 자하문과 무악재를 넘어오는 나무장수들은 황톳마루(세종로 네거리)를 지키고 있는 부래상의 눈에 띄면 그에게 나무 짐을 넘기기 일수였다. 그는 어깨에 화살통만한 보온병을 메고 있다가, 나무장수가 다가오면 "고양 부씨입니다"하고 인사를 청하고는 보온병에 들어 있는 가배차를 따라 주었다.

이 사람과 경쟁하며 땔감 나무 시장 세 곳을 운영하고 있던 최순영이라는 사람이 이었다. 최씨는 당시 나무장수들 사이에서 '양탕국'이라고 알려진 이 커피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를 독살하는 데 사용되었던 그 '독아편'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황제를 커피차로 독살하려 기도하였던 그 사건 이야기는 당시 유명했다.

이듬해인 1969년에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던 이규태씨는 <개화백경>이라는 제목의 4책 분량 전집을 간행하면서 이 내용을 포함시켰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1976년 3월 31일 자 <조선일보>에 다시 등장하였다. 이 날짜 <조선일보> 제1면 가십 기사인 '만물상' 코너에는 '쳇골'이라 불리던 광화문우체국 자리의 지명에 얽힌 이야기가 소개되었는데, 이 기사에서 부래상의 '양탕국' 이야기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1968년 원본 기사와 다른 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부래상씨가 "나는 고양부씨입니다"라고 아양을 떨었다는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최순영씨가 "데마(필자: 허위선전을 의미하는 Demagogy의 약어)를 퍼뜨려 부래상은 하루아침에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믿기 어려운 '가짜뉴스', 하지만...
 
 1960~1990년대 자취방, 만화방, 음악다방, 문방구 등이 있는 옛 서울의 골목길을 재현한 서울생활사박물관의 모습.
ⓒ 연합뉴스
 
이 기사에 나오는 부래상의 원래 이름은 폴 앙뚜앙 플래상(Paul Antoine Plaisant)이다. 플래상은 1871년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으로 1900년 열렸던 파리 만국박람회 조선관을 관람한 후 동생과 함께 입국하여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첫 사업이 땔감나무 장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후 기록을 보면 플래상은 여러 사업을 하며 조선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다. 1908년에는 그가 우리나라 최초로 연탄을 제조 판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프랑스에서 기계를 도입하여 난방용 연탄을 제조 판매한 것이다. 1920년대에는 화장품과 향수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같이 입국한 후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살던 세 살 아래 동생은 1928년에 한양 땅에서 먼저 사망하였지만, 형 플래상은 이후에도 계속 조선에 거주했다. 1934년까지 플래상은 성북동의 70여 평 서양식 건물이 딸린 꽤 넓은 저택에 거주하였다.

이 살림집과 부지는 간송 전형필에게 매각되어 현재의 간송미술관이 지금 자리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간송에게 이 집과 대지를 매각할 당시 플래상은 석유판매상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플래상은 땔감으로 시작해서 적어도 30년 정도 조선에서 연탄, 그리고 석유 등 난방 물품 사업을 했던 것은 확실하다. 직접 지은 70여 평의 서양식 주택에서 살았던 것을 보면 땔감 나무 장사에서 실패했다는 <조선일보>의 가십 기사는 사실과 다른 가짜뉴스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플래상은 조선에서 사업을 위해 장기 거주했던 흔치 않은 유럽인이었음은 분명하다.

1939년에 네덜란드 명예총영사 신분을 가지고 죽첨정(현 충정로)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그가 조선 생활에 비교적 잘 적응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의 조선 체류 후반부는 비극으로 마무리되었다. 명예총영사 신분을 이용하여 가짜 프랑스 명품 화장품 '세봉'을 제조하여 판매한 혐의, 그리고 이 과정에서 탈세를 한 혐의 등으로 형을 선고받은 후 추방되었다.

이 흥미로운 인물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 '양탕국'이라는 표현이 정말 1910년 전후 고양의 땔감 나무 장사들 사이에서, 심지어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는 근거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이 글을 쓴 이규태씨도 이 용어의 출처를 제시한 적이 없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일 수도 있고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가 전한 부래상의 이야기에 정확성이 결여된 것을 보면 양탕국 이야기 또한 믿기는 어렵다. 물론 시중에서 사용되던 용어가 모두 신문이나 잡지 등 인쇄 매체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시기에 널리 사용되던 용어라면 '카피차'나 '가배'처럼 한 번이라도 등장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근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1976년 이후 '양탕국' 이야기는 우리나라 커피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많은 글 속에 사실처럼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양탕국' 이야기는 역사적인 근거나 사실보다는 재미가 사람들에게 더 잘 스며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나 지금이나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이유다. 1976년은 가짜 커피의 대명사 '꽁초커피'가 유행하여 커피애호가들의 마음을 쓰리게 한 바로 그 해였다.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의 저자, 교육학교수)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1976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기사 일체. 1968년 12월 26일 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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