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 불안했던 남자의 사랑... 진심은 통했다

양형석 2024. 4. 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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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펀치 드렁크 러브>

[양형석 기자]

한국영화는 2003년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를 시작으로 올해 개봉한 장재현 감독의 <파묘>까지 총 23편의 천만 영화가 탄생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그리고 <괴물>과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해운대>,<국제시장>의 윤제균 감독, <도둑들>,<암살>의 최동훈 감독,<신과 함께> 시리즈의 김용화 감독은 나란히 두 편의 천만 영화를 연출하며 관객들로부터 '쌍천만 감독'으로 불리고 있다.

사실 한국영화에는 봉준호, 최동훈 감독보다 더 어린 나이, 그리고 더 빠른 시기에 '쌍천만 감독'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 있다. 바로 2022년과 2023년 <범죄도시 2,3>를 천만 관객으로 이끈 이상용 감독이다. 하지만 <범죄도시> 시리즈는 감독의 역량보다는 주연배우 마동석의 비중이 워낙 큰 영화이기 때문에 이상용 감독은 아직 진정한 '흥행감독'으로 인정 받진 못하고 있다(공교롭게도 이상용 감독의 차기작 역시 <범죄도시5>가 될 예정이다).

사실 영화계에서는 만드는 영화마다 높은 흥행성적을 기록하는 감독이 있는 반면에 만드는 영화마다 뛰어난 작품성과 완성도를 인정 받으면서도 정작 흥행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감독도 있다. 국내에서는 고 김기덕 감독이나 홍상수 감독이 흥행과 인연이 없는 대표적인 감독이라면 할리우드에서는 역시 이 감독을 꼽을 수 있다. 2002년 독특한 정서의 멜로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를 연출했던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이다.
 
 <펀치 드렁크 러브>의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은 2002년 칸 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과 감독상을 공동수상했다.
ⓒ 콜럼비아트라이스타
 
세계 3대 영화제 모두 수상한 천재감독

1970년 미국 LA에서 태어난 앤더슨 감독은 10대 초반부터 비디오카메라로 단편영화를 찍으며 감독의 꿈을 키웠던 영화광 출신이다. 특히 앤더슨 감독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열렬한 팬으로 그가 연출한 <분노의 주먹>과 <좋은 친구들>을 100번 넘게 감상했고 대학도 스코세이지 감독이 나온 뉴욕대학교 영화과에 진학했다(하지만 앤더슨 감독은 교수와 자신의 영화철학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졸업을 하지 않고 자퇴했다).

1996년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로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 받은 앤더슨 감독은 1997년 그의 첫 번째 대표작 <부기나이트>를 만들었다.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과 앤더슨 감독의 연출이 조화를 이룬 <부기나이트>는 아카데미 시상식 3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앤더슨 감독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렸다. 톰 크루즈가 출연했던 1999년작 <매그놀리아> 역시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걸작이다.

앤더슨 감독은 2002년 코미디배우로 유명했던 애덤 샌들러를 앞세운 독특한 스타일의 멜로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를 선보였다. 앤더슨 감독은 <펀치 드렁크 러브>를 통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영화를 벗어나 실험적인 문법을 선보이며 관객과 평단의 극찬을 받았고 그 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공동수상했다(당시 앤더슨 감독과 함께 칸 영화제 감독상을 공동수상한 인물이 바로 <취화선>의 임권택 감독이었다). 

앤더슨 감독은 2007년 아카데미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다니엘 데이 루이스 주연의 <데어 윌 비 블러드>를 통해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BBC가 선정한 21세기 100대 영화 중 3위에 올라 있는 작품이다. 앤더슨 감독은 2012년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마스터>를 통해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세계 3대영화제에서 모두 상을 받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사실 각종 영화제 수상 경력만 보면 미국을 대표하는 '거장'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지만 앤더슨 감독은 정작 자국의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경력이 한 번도 없다. 만드는 영화마다 평단의 극찬을 받으면서도 흥행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하는 것도 앤더슨 감독의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색깔을 지키며 영화를 만드는 앤더슨 감독은 2021년에도 <리코리쉬 피자>를 통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각본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정서 불안정한 남자의 성장과 사랑이야기
 
 영화에서 배리가 했던 '푸딩 사재기 재테크'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장면이다.
ⓒ 콜럼비아트라이스타
 
'펀치 드렁크'는 선수생활 동안 안면부위에 많은 펀치를 허용한 복싱선수들이 은퇴 후 뇌세포 손상으로 인해 혼수상태와 정신불안, 기억상실 등의 증세를 보이는 경우를 말한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7명의 여자형제와 함께 자라면서 마치 펀치 드렁크에 시달리는 복싱선수처럼 자아분열을 일으키는 주인공 배리(애덤 샌들러 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리의 여자형제들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배리를 괴롭힌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가벼운 로맨틱코미디를 기대한 연인 관객들을 실망시키는 요소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펀치 드렁크 러브>는 2500만 달러로 썩 많은 제작비가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2400만 달러의 성적을 기록하며 흥행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하지만 <펀치 드렁크 러브>는 2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애덤 샌들러와 앤더슨 감독의 필모그라피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작품이 됐다. 

<펀치 드렁크 러브>의 주인공 애덤 샌들러는 <콘헤드 대소동>과 <백만장자 빌리> <웨딩 싱어> <빅 대디> 등 주로 가벼운 코미디 영화를 통해 이름을 알리던 배우였다. 그런 샌들러에게 <펀치 드렁크 러브>는 배우로서 꽤나 위험한(?) 도전이었지만 샌들러는 자아분열에 시달리는 배리 역을 멋지게 소화했다(물론 샌들러는 <펀치 드렁크 러브> 이후에도 많은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며 코미디 배우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다). 

샌들러는 처음 앤더슨 감독으로부터 <펀치 드렁크 러브>의 출연제의를 받고 거절의사를 밝혔다. 샌들러가 앤더슨 감독의 전작 <매그놀리아>를 매우 인상 깊게 봤는데 코미디 배우인 자신이 그의 작품에 출연하면 영화를 망칠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앤더슨 감독 역시 샌들러의 대표작 <빅 대디>를 매우 좋아한다며 샌들러를 설득했고 결국 두 사람은 <펀치 드렁크 러브>를 통해 감독과 배우로 멋진 호흡을 선보였다.

<펀치 드렁크 러브> 속에서 배리는 항공 마일리지를 쌓을 수 있는 쿠폰이 있는 푸딩을 잔뜩 모으는 장면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장면이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한 남성은 푸딩회사의 항공 마일리지 증정 이벤트를 보고 무려 1만2150개의 푸딩을 구매해 엄청난 항공 마일리지를 적립했다. 이 남성은 동네 구세군 직원들을 동원해 쿠폰을 잘라주는 만큼 푸딩을 기부하면서 세금혜택까지 누렸다고 한다.

주인공의 '펀치 드렁크' 극복하게 한 여인
 
 에밀리 왓슨은 배리의 펀치 드렁크 증상을 극복하게 해준 여인 레나를 연기했다.
ⓒ 콜럼비아트라이스타
 
수다쟁이 여동생의 직장동료인 레나는 평소 호감이 있던 배리에게 찾아가 카센터에 차를 맡겨 달라는 부탁을 한다. 심한 불안장애 때문에 가족들 앞에서조차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던 배리는 레나를 만난 후 조금씩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주체적으로 하는 사람으로 변한다. 레나는 어린 시절부터 7명의 여자형제들에게 시달렸던 배리의 오랜 펀치 드렁크 증상을 극복하게 해준 여인이다.

레나를 연기한 영국출신 배우 에밀리 왓슨은 1996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에 빛나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명성을 얻었다. 국내 관객들에게는 크리스찬 베일이 나오는 SF 액션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 감정을 가진 여인 메리 오브라이언을 연기한 배우로 알려져 있다. 왓슨은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통해 은곰상-조연상을 수상했다.

지난 2014년 만4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연기파 배우 고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펀치 드링크 러브>에서 가구점으로 위장한 폭력조직의 우두머리 딘을 연기했다. 딘은 영화의 빌런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장르가 장르인지라 영화 속에서 비중이나 분량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배리와 벌이는 전화배틀과 각성한 배리와 가구점에서 대면하는 장면에서는 호프먼의 뛰어난 연기와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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