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틀막' 고려대학에서 해직 당해

김삼웅 2024. 4. 2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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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 15] 강만길에게도 유혹의 손길이 뻗쳤다

[김삼웅 기자]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본관.
ⓒ 권우성
 
신군부가 날조한 사건으로 한 달 동안 유치장에서 곤욕을 치르고 나왔다. 그런데 석방 한 달여 뒤에 고려대로부터 해직 통보를 받았다. 심신을 치유할 틈도 주지 않고 가해진 또 다른 폭압이었다. 직장인에게 해직은 밥줄을 끊는 가혹한 형벌이다. 고려대학에서는 강만길과 함께 이문영, 김윤환, 조용범, 김용준, 이상신 교수 등이 해직 통보를 받았다.

전두환 정권은 학계와 언론계의 양심적인 교수와 기자들을 쫓아냈다. 비판적인 지식인과 언론인들의 일대 수난기였다. 독재자가 비판을 싫어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초기의 학계와 언론계의 숙정 선풍은 유례 드문 폭거였다. 이때 수많은 대학생이 제적당하기도 했다.

대학교수의 해직은 요즘 말로 하면 '입틀막'이다. 바른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고 아예 설 자리를 박탈해 버린 것이다. 오래전 왕조 시대에 있었던 귀양이나 유배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다. 구속 수감할 꼬투리를 찾지 못한 교수들은 학교(재단)에 압력을 넣어 교직을 빼앗았다.

성북경찰서에서 석방된 지 한 달이 지난 1980년 7월 말경이었다. 교무처장인 영어영문학과의 김권호 교수가 연구실에 찾아와서 난처한 얼굴로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교부에서 사표를 받으란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쥐는 과정에서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대학교수뿐만 아니라 언론인과 고등학교 교사·공무원들을 대량으로 '숙청'하려는 것 같다고 했다. (주석 1)

학계와 언론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전두환은 노동계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새로 노사협의회법을 만들어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신설해 외부의 지원이나 연대를 차단하고, 노동조합에 대한 행정관청의 간섭을 합법화했으며, 쟁의행위를 규제하는 내용을 담아 단체행동을 제한하는 등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해직교수는 전국적으로 86명이었다. 대부분 반유신운동과 서울의 봄 시기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학자들이었다. 반문명적인 독재자의 칼춤에 언제까지 침묵할 수는 없었다. 쫓겨난 당사자 대부분이 강골 학자들이었다.

악명높던 중앙정보부의 후신 국가안전기획부의 감시가 어찌나 심했던지 해직교수들이 서로 만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에서 해직된,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진균 교수 등과 자주 다닌 등산모임을 가장해 해직교수협의회를 만들기도 했다.

어느 날 김진균 교수가 이화여대에서 해직된 이효재 교수, 그리고 몇 사람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등산을 겸해서 세검정 쪽 어느 장소에서 몰래 만나 서울대에서 해직된 변형윤 교수를 회장으로 한 해직교수협의회를 만들었다. 협의회는 1주일에 한 번씩 세검정의 어느 중국 음식점에서 모임을 가지기로 했는데, 안기부의 감시가 너무 심해서 모이기가 정말 어려웠다. (주석 2)

1982년 12월, 정부는 국민화합이라는 구실로 제적학생 복교 조치를 발표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격이었다. 그동안 정부는 제적학생과 해직 교수들을 좌경용공으로 몰면서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정책을 폈다. 고려대 제적학생복교대책위원회는 1983년 3월 8일에 <학원의 민주화를 거듭 촉구한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의 처사를 격렬히 비판했다.

고려대 제적학생들의 성명서는 해직교수들은 물론 당시의 시대적 현안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성명서 뒷부분에는 이들의 주장과 다짐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첫째, 잔여 구속자는 즉각 석방되어야 하며 미복권자는 복권되어야 한다.
둘째, 학원에 폭력을 행사하고 학내 민주화를 말살하려는 어떠한 형태의 변형된 사찰행위에도 강력히 대처할 것이다.
셋째, 학원의 민주화와 자율화를 보장하는 제반 기구와 제도가 확립되어야 한다.
넷째, 해직 교수들은 반드시 원래의 대학으로 복직되어야 한다.
다섯째, 학생운동에 대해 강제적이고 불법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지도휴학제 및 강제징집제가 철폐되어야 하며 우리는 이를 위해 끝까지 싸워 나갈 것이다.
여섯째,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여 이미 수형생활을 마친 제적학생들을 생명조차 보장되지 않는 병영으로 몰아가려는 병역법 시행령 개악 저지를 위해 우리는 끝까지 싸워 나갈 것이다.

우리는 이 기회를 학원의 민주화,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전기로 받아들인다. 아울러 모든 제적학생, 학원 내의 학우들, 그리고 학계, 종교계 등의 양심적 지식인들을 비롯하여 민주화를 열망하는 각계각층의 노력을 바탕으로 우리가 참으로 다시 공부할 수 있기까지 보다 적극적으로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갈 것임을 재천명하는 바다. (주석 3)

해직교수협의회는 몇 차례 더 성명을 발표했으나 제도언론에서는 대부분 보도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직교수들에게 개별적으로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다. 원래 소속되어 있던 학교가 아닌 다른 대학으로 가면 복직을 허용하겠다는 제안이었다. 강만길에게도 유혹의 손길이 뻗쳤다. 그에게는 강원대학 교수직이 제안되었으나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주석
1> <역사가의 시간>, 258쪽.
2> 위의 책, 262쪽.
3> <암흑 속의 횃불(5)>, 56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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