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뺌 막는 빼박

이형민 2024. 4. 20.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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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증거 보물섬 휴대전화
게티이미지뱅크


2017년부터 국내 체류하던 이집트인 A씨는 2022년 8~9월 온라인을 통해 베트남 마약 판매상에게서 213만원어치 액상 대마 30병을 사들였다가 적발돼 재판에 넘겨졌다. 결정적 증거는 압수수색으로 확보된 A씨 휴대전화 속 페이스북 메신저 대화였다. A씨는 평소 쓰던 마사지 오일을 구매했다고 주장했지만 해당 제품이 수입 금지된 합성대마인 줄 알고 있었던 정황이 드러났다. A씨는 판매상에게 “가장 강력하고 높은 함량을 원한다”고 거듭 말했고, 제품을 샴푸 등 일상용품으로 위장해 들여오는 것을 논의했다. A씨 측은 재판에서 “수사기관이 만들어낸 대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1·2심 모두 징역 3년이 선고됐다. 검찰과 A씨가 상고하지 않아 판결은 지난해 확정됐다.

휴대전화 확보가 수사 성패 가른다

스마트폰 형태 휴대전화에는 개인의 거의 모든 사생활이 담긴다. 휴대전화만 확보하면 통화 녹취록, 문자메시지, 카카오톡 등 사적인 대화를 통해 소유자의 일정과 동선, 그 구체적인 배경까지 확인할 수 있다. “자백이 증거의 왕”이라는 말은 옛말이 됐고, 이제 그 자리를 휴대전화가 대신한다. 2016년 국정농단 사건 수사를 받던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휴대전화 교체가 가장 중요하다. 전자레인지에 돌려 복원이 불가능하도록 하는 방법이 안전하다”는 내용의 대응 문건을 작성하기도 했다.

범죄 혐의자들은 휴대전화를 숨기려 하기 때문에 휴대전화 확보는 수사 성패를 결정하는 요소로 꼽힌다. 지난해 경찰백서에 따르면 2013년 7332건이었던 휴대전화 디지털포렌식 건수는 2022년 5만7034건으로 7.7배 늘었다. 2022년 전체 디지털 기기 포렌식 사례(7만929건) 중 휴대전화 비중은 80.4%나 됐다.


전자 정보, 원칙은 선별 압수지만…

전자정보 압수수색은 범죄 혐의 관련 부분만 선별 압수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자택 등 압수수색 현장에서 휴대전화 안에 있는 방대한 정보를 일일이 선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법원은 이럴 때 예외적으로 휴대전화 기계를 수사기관 사무실 등으로 반출하는 것을 허용한다.

수사기관은 휴대전화를 통째로 복제한 이미지 파일을 만들고, 따로 날을 잡아 피압수자나 변호인이 보는 앞에서 추출한 정보 중 혐의 관련 정보만 선별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휴대전화는 피압수자에게 돌려준다. 혐의와 무관한 정보가 함께 통째로 복제된 이미지 파일은 폐기하는 게 원칙이다.

A씨 사건은 현장의 선별 압수가 어려워 휴대전화 기계를 통째로 압수한 사례였다. 압수 후 특별사법경찰은 A씨에게 참여권을 고지하고 동의를 받아 혐의 정보를 선별했고 휴대전화는 돌려줬다. 사실상 대부분 휴대전화 압수수색이 이런 과정을 거친다. 재판에서 A씨 측은 돌려받은 휴대전화에 문제의 페이스북 대화가 없다며 증거 조작을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A씨 휴대전화 원본과 추출 자료의 ‘해시값’이 동일하다며 조작 가능성을 부정했다. 오히려 A씨가 휴대전화를 돌려받고 페이스북 대화를 지웠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검찰과 법원, 미묘한 온도차

최근 논란이 된 이진동 뉴스버스 대표 사건도 휴대전화 압수수색 증거를 놓고 벌어졌다. 이 대표 휴대전화를 통째로 복제한 이미지 파일이 ‘대선여론조작 사건’ 관련 혐의를 선별 작업한 후에도 폐기되지 않고 대검찰청 디지털수사망(디넷)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검찰은 A씨처럼 재판에서 증거 조작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어 불가피하게 통째 복제파일을 남겨둔다고 해명했다. 선별 추출된 자료와 원본 해시값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제시해 증거 조작 주장을 차단하기 위해 임시로 복제파일을 남겨둔다는 것이다. 임시 보관한 복제파일은 법정에서 증거 조작 시비가 있을 경우 예외적으로 사용된다는 게 검찰 입장이다. 검찰은 재판이 끝나면 복제파일은 전부 폐기한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선 검찰이 보관 중인 복제파일을 재활용해 별건 수사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한다. 하지만 디넷에 저장된 혐의와 무관한 정보에 대해 별도 영장을 받아 수사하는 일은 위법하다는 대법원 판례가 지난해 확립됐다. 한 검찰 중간간부는 “피의자들의 압수수색 대응은 고도화되는데 법원의 전자정보 압수수색 통제는 점점 더 엄격해지고 있다”며 “오히려 사건의 실체적 규명에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자정보 선별에 피압수자 등이 참여하도록 하는 대법원 판례에 대해서도 검찰에선 “수사기관이 무슨 패를 들고 있는지 다 보여주고 수사하라는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변호사 업계에서는 휴대전화 압수수색이 더 엄격히 통제돼야 한다는 반박도 나온다. 사건과 무관한 개인 정보가 보관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피압수자가 공포와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상당수 검사들이 증거 조작 시비 등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관성적으로 ‘원본 보존’란에 체크한다”며 “보관 중인 혐의 무관 정보를 다시 증거로 쓰는 건 위법하지만, 그 정보를 기초로 관련 사건의 판을 짜고 수사전략을 세우는 데 활용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대법원도 이번 논란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법원행정처는 지난해 12월 ‘강제수사 절차의 기본권 보장’ 정책연구용역을 발주하며 디넷에 보관 중인 무관 정보의 폐기 상황에 대한 연구를 포함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법원은 혐의와 무관한 정보의 수집을 통제하는 차원에서 김명수 전 대법원장 시절 도입을 추진하다 수사기관 반발로 무산된 ‘압수수색영장 사전 심문제도’에 관한 검토도 진행 중이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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