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의 또다른 리스크... 그에겐 이사람이 없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집무실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
ⓒ 대통령실 제공 |
근래 들어 '한일 반목은 미국의 세계전략에 위험하다'는 경고가 미국에서 자주 나온다. 지난해 4월 25일(현지 시각),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에 도착한 다음날에 <뉴욕타임스>는 한미관계가 아닌 한일관계에 관한 기사를 내보냈다.
'왜 한국-일본 간 긴장완화가 미국의 전략에 결정적인가'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보도된 이 기사는 한일 역사갈등이 인도태평양 전략의 약한 고리라며, 조 바이든 대통령이 한일관계의 추가 해빙을 윤 대통령에게 촉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미국인들이 한일관계를 우려하는 것은 이것이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한미일 안보협력에 기초한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11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무부 오찬에서 연설하고 있다. |
ⓒ 로이터/연합뉴스 |
이처럼 지금의 한일관계는 안정적인 듯하지만 실상은 불안정하다. 미국에서 미·일·필리핀 정상회의를 마치고 지난 14일 귀국한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사흘 뒤 윤 대통령에게 전화 통화를 제의한 데서도 이를 느낄 수 있다.
미·일·한 정상회의에 뒤이은 미·일·필리핀 정상회의 시스템의 구축은 한미일 역학관계에서 한국의 지위를 떨어트리고 있다. 동아시아를 형성하는 동북아·동남아 두 지역을 미국과 일본이 함께 주도하며 한국과 필리핀은 2위 그룹으로 자리매김되는 형국이 조성되고 있다. 기시다 총리가 15분간의 통화에서 이번 방미 결과를 설명한 것은, 미·일·한 및 미·일·필리핀 2원 체제로 인해 한국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의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시다가 전화를 건 목적은 또 있다. 총선으로 인해 윤석열 정권이 정치적 타격을 받은 직후라는 점과, 독도·강제징용 등에서 한국을 더욱 자극한 <외교청서 2024>가 공개된 다음날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할 듯하다.
두 정상이 통화하기 전인 17일 오후에 보도된 <마이니치신문> 기사 '일·한 수뇌가 17일 밤에라도 전화 협의'는 복수의 소식통을 근거로 "한국에서는 10일 총선거로 여당이 대패했다"며 "수상은 윤씨와의 개인적인 신뢰를 기초로 일한관계를 계속해서 개선하려는 의향으로, 전화 협의는 수뇌 간의 좋은 관계를 어필할 목적도 있는 듯하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에서 나타나듯이, 일본은 총선 패배로 인한 한일관계의 불안정성을 윤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메우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양국간 공적 관계가 아닌 정상 간의 개인적 관계를 활용하는 이런 모습은 겉으로는 화려한 듯하지만, 실상은 취약한 한일관계의 현 주소를 반영한다.
▲ 1962년 10월 20일, 당시 오히라(大平)일본외상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
ⓒ 연합뉴스 |
그런데 1964년과 1965년에 거국적인 저항을 당하고도 박정희는 정치적으로 죽지 않았다. 민심은 잃었지만, 권력은 잃지 않았다. 도리어 1969년에는 3선 개헌에 성공하고, 1972년에는 종신군주제나 다름없는 유신체제를 성사시켰다.
이것이 가능했던 요인 중 하나는 2인자 김종필의 '희생'이다. 김종필이 굴욕외교로 인한 정치적 부담을 거의 홀로 떠안다시피 한 결과인 측면도 강하다.
김종필의 '자의반 타의반' 외유는 민주공화당 창당 전날인 1963년 2월 25일에 있었다. 이 외유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민정복귀 약속을 어기고 민주공화당을 은밀히 창당하며 부정한 방법으로 정치자금을 모은 데 대한 여론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종필은 1964년 6월 18일에도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떠났다. 이날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서 박정희 하야 구호가 등장(6·3사태)한 지 보름 뒤였다. 이 외유는 굴욕외교에 대한 국민적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일기본조약과 부속 협정들(통칭 한일협정)을 체결한 인물은 이동원 외무부장관이다. 이동원은 1964년 7월부터 1966년 12월까지 재직하면서 식민지배 문제 해결 없이 국교를 복원했다.
이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1992년에 회고록인 <대통령을 그리며>에서 "난 무려 15년을 끈 한일회담의 장 한가운데 서서 1965년 끝내 완성시킨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라며 "비록 완벽했다고 할 순 없다 해도 가문 대대로 이 일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고 자부했다.
이동원은 이렇게 자부했지만, 세상은 이동원이 아닌 김종필을 이 문제의 주역으로 생각했다. 김종필의 제2차 자의반·타의반 외유는 그런 세상의 시선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김종필은 지급 명목을 정하지 않고 한국에 금전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국교 문제를 정리하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1962년에 작성한 일,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대신과의 이 협상에서 "우리 해군을 시켜 독도를 폭파해 버리겠다"고 발언했다는 일로 인해 국민적 비판을 한 몸에 받았다.
김종필이 식민지배 배상을 경제지원으로 대체했다는 김종필·오히라 메모, 김종필이 독도를 폭파시켜 화근을 없애자고 했다는 독도 폭파설은 굴욕외교의 주역이 정권 2인자라는 인상을 조성했다.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절정에 달한 시점에 그가 비행기를 탄 것은 그런 이미지를 고려한 결과다.
<김종필 증언록> 제1권은 중앙정보부장인 그가 총리나 외무대신 같은 일본 당국자들을 만난 일을 두고 "국가정보기관의 장이 나설 성격이 못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필 자신의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그의 대일외교는 정보부장의 권한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일을 맡게 된 경위에 관해 그는 "박정희 의장에게는 일이 거의 성사된 단계에서 보고드렸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절 모르게 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대일관계 전면에 나선 것은 상당 부분은 그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지만, 최종적으로는 박정희의 승인에 따른 것이었다.
외무부장관이 아닌 중앙정보부장이, 그것도 정권 2인자가 굴욕 협상의 전면에 나섰다. 그런 뒤 김종필·오히라 메모와 독도 폭파설 같은 충격적인 내용이 국내에 알려졌다. 국민들의 분노를 김종필에게 집중되도록 만드는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박정희를 보호하는 기능을 했다. 박정희에게 집중될 비난이 크게 분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가 거국적인 저항을 겪고도 3선 개헌과 유신 개헌에까지 나설 수 있었던 것은 한일협정으로 인한 타격을 덜 받은 것과 무관치 않다. 18년의 장기집권에는 2인자 김종필의 '희생'이 컸다고 평할 수 있는 것이다.
▲ 지난해 11월 16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대일 굴욕외교에서는 윤 대통령 개인이 꽤 크게 부각돼 있다. 윤 정권의 대일외교에서는 '김종필'이 등판하지 않았다. 박진 전 외교부 장관이 실무를 진두지휘했지만, '박진이 다 알아서 한다'는 인상은 조성되지 않았다.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은 여기에 뛰어들지 않았다. 러브샷 등에서 나타나듯이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개인적 친분이 지나치게 부각됐다. 박정희에 비해 윤 대통령이 굴욕외교로 인한 비판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구도라고 할 수 있다.
이번 4·10 총선에서 2인자인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타격을 입었다. 일본인들은 이 외에 박진·정진석의 타격에도 주목한다. <산케이신문>은 11일 자 기사 '일한관계 지지한 중진 낙선'에서 박진·정진석 낙선을 전한 뒤 "윤석열 정권하의 대일관계 개선을 지탱해 온 중진들이 의석을 잃었다"고 평했다.
2인자의 퇴진과 대일 라인의 낙선이 있은 직후,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를 전격 제의함으로써 한일관계의 한국 측 주역이 윤 대통령임을 다시 한번 부각시켰다. <마이니치신문>는 기시다 내각이 윤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을 활용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런 보도는 윤 대통령만 있으면 한일관계는 문제 없다는 인상을 조성하기에 충분하다.
한일관계는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뇌관이다. 4·10 총선으로 인해 그 가능성이 좀 더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현재 한일관계를 주도하는 몸통임을 부각시키는 장면들이 일본에서 변함없이 나오고 있다. 향후 뇌관이 폭발하면 한 사람에게 비판이 집중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현상이 일본에서도 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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