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등재, 세계가 인정한 4.19 혁명의 가치
[성찰과성장]
|
▲ 제216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 현장사진 |
ⓒ 문화재청 공공누리제1유형 |
들어가며
|
▲ 마산지역 학생의 일기(1960.3.20.) “공부를 하다가 마음 속에 불이 나는 것 같고”라는 문장이 보인다. |
ⓒ 문화재청 공공누리제1유형 |
2023년, 이 혁명의 중요성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로써 4·19 혁명은 한국 내부의 역사를 넘어 전 세계에 그 의미를 전달하게 되었다. 2024년 4·19 혁명 기념일은 이 특별한 인정을 받은 후 처음 맞이하는 해로서, 우리는 4월 19일을 통해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앞으로도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중요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
▲ 4·19혁명 기록물 ‘의에 죽고 참에 살자(1960.4.19.)’ |
ⓒ 대한민국정책브리핑(공공누리 제1유형) |
3.15 부정 선거
|
▲ 1960년 서울시내 정˙부통령 선거전 모습 |
ⓒ 국가기록원 |
이승만은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1954년 사사오입을 통해 영구 집권을 노렸다. 자유당은 1958년 12월 24일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을 강제로 축출하고 국가보안법 및 지방자치법을 개악했다. 국가보안법에는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을 처벌할 수 있다는 조항이 담겼고, 지방자치법은 선거로 선출하던 지방자치단체장을 정부가 임명하겠다는 쪽으로 개악됐다. 이를 '24파동'이라 한다. 결국 1년 뒤, 3.15 부정선거가 발생했다.
1960년 1월 23일에 실시된 경북 영일군(을)과 영주군 국회의원 재선거는 3.15부정선거를 위한 예행연습이었다. 이 재선거에서는 자유당은 미리 기표한 투표용지 40%를 투표함에 미리 넣어두는 부정을 저질렀고, 여기에 더해 3명과 9명씩 짝을 지어 조장이 기표 사실을 확인하는 공개투표까지 저질렀다(3인조·9인조 공개 투표). 이러한 수법은 이후 3.15부정선거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
▲ 3ㆍ15 정ㆍ부통령 선거 시 이승만 대통령 투표 모습 |
ⓒ 서울역사아카이브 |
민주화운동사전에서 정리한, 대표적인 부정선거 방법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민주당 참관인의 투표소 입장 및 참관 방해.
2) 투표 개시 이전, 새벽부터 참관인 없이 진행된 사전 투표(지역에 따라 사전 투표율은 75~80%에 달함).
3) 민주당 참관인에 대한 폭행과 축출.
4) 유권자와 취재기자 폭행.
5) 한 기표소에 3명이 함께 들어가는 3인조 공개 투표.
6) 야당 지지자는 투표하지 못하도록 번호표 미교부.
7) 참관인석에서 볼 수 없는 위치에 투표소와 기표소 설치.
8) 대리 투표와 무더기 투표.
|
▲ 전국 각 대학생 대표가 김주열 열사 묘소에 헌화하는 모습? |
ⓒ 국가기록원 |
4.19혁명
|
▲ 4.19 학생 의거 사진 (지역 불명) |
ⓒ 국가기록원 |
마산 시위는 12, 13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다만 한 달 전의 시위와 달리, 4월 마산에서의 시위는 새로운 요구사항이 나타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구호가 등장한 것이다. 3월 15일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서는 주로 학원의 자유, 정치 도구화 반대, 부정선거 배격, 공명선거 보장 등의 구호가 외쳐졌다.
|
▲ 4.19 학생 의거 사진 (지역 불명) |
ⓒ 국가기록원 |
4월 18일 고려대 학생 3000여 명이 모여 "민주 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가두행진으로 이어 가려 했지만, 경찰의 저지선을 뚫지 못 했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몰래 빠져나와 국회(현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서 1000여 명이 다시 결집했다. 시위대는 연행된 학우들의 석방과 이승만 대통령이나 최인규 내무부장관의 부정선거 해명을 요구했다.
시위대는 6시 40분경 평화적으로 해산했다. 그러나 귀가하던 고려대 학생들이 봉변을 당했다.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유지광 대한반공청년단 동부특별단 부단장이 이끄는 화랑동지회 소속 정치깡패 60여 명이 흉기를 들고 학생들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50여 명의 학생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다음 날, 고려대 학생들의 피습 소식이 대서특필되었고, 다른 대학 학생들에게도 급속도로 퍼졌다. 이 사건으로 인한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가 일제히 폭발하면서 4월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이승만 부부(왼쪽 2인)와 이기붕 가족(우측 3인) |
ⓒ 국가기록원 |
한편, 광화문 쪽에서는 성균관대, 연세대, 홍익대 학생들이 서대문 이기붕 집 앞에서 경찰대, 헌병, 정치깡패와 대치했다. 내무부(현 외환은행 본점, 을지로입구역) 앞에서도 서울대, 건국대, 동국대, 성균관대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늦은 오후가 되자,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에서 남대문까지의 대로를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메웠다. 경찰이 곳곳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사상자가 연이어 발생했다.
|
▲ 경찰의 발포 현장을 검증하는 모습 (경무대)? |
ⓒ 국가기록원 |
서울뿐만 아니라 광주, 부산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을 고려했다. 내무부장관 홍진기가 계엄령 선포를 건의했고, 국방부장관 김정렬이 동의했다. 이승만의 승낙으로 오후 3시경 서울지구 일대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김정렬은 가평에 있는 국군 제15사단을 끌어 들여 시위를 무력 진압하고 했다.
이승만의 하야
|
▲ 4.19 희생자 합동 위령제(1960. 4. 24. 용산 부근 옛 육군야구장) |
ⓒ 국가기록원 |
4월 26일 오전 8시 30분경 동대문, 세종로 일대에 7만5000여 군중이 모였다. 시위대는 광화문 사거리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뚫고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으로 나아갔다. 진압대는 이에 최루탄으로 맞섰다다. 오전 10시경 시위대는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주한미국 대사 월터 매카너기는 김정렬 국방부장관에게 정부통령 재선거 문제를 논의하고 이승만의 장래 역할을 숙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내려놓기로 결심한다. 약 한 달 뒤인 5월 29일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
▲ 4.19 혁명 당시 모습. 시위대 뒤로 중앙청 돔이 보인다. |
ⓒ 국가기록원 |
4.19 혁명이 남긴 것
|
▲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서 |
ⓒ 국가기록원 |
4.19 혁명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독재에 맞서 국민이 직접 일어나 목소리를 높인 최초의 사례이며, 대한민국 최초로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가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후 시민들의 대규모 참여로 사회 전반의 민주화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학생과 시민이 사회 변화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명확히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더 큰 의미에서 볼 때, 4.19 혁명은 내전으로 확전되지 않고 비교적 평화로운 방법으로 대통령을 하야시킨 시민혁명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러한 평화적 접근 방식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시민혁명은 약 55년이 지난 박근혜 탄핵으로 이어진다.
|
▲ 국립4·19민주묘지 전경 |
ⓒ 박배민 |
일상 속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학습 놀이터
'성찰과성장'
글 작성 및 편집 : 박배민
성찰과성장.com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외부 채널(성찰과성장, 캠페인즈, 얼룩소)에도 함께 발행됩니다. 참고문헌 《고려대학교 4.18의거 실록》, 고려대학교출판부, 2012, 586쪽. 4.19혁명디지털아카이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19혁명 (四一九革命)’ 민주화운동사전 ‘4월혁명(4.19혁명) ‘ 국가기록원 <연표와 기록> 《조선일보》, 1960. 3. 14.(석간) 《동아일보》, 1960. 3. 14.(석간) 《부산일보》, 1960. 3. 15.(석간) 《조선일보》, 1960. 3. 15.(석간) 《조선일보》, 1960. 3. 15.(조간) 《동아일보》, 1960. 3. 16.(석간) 《마산일보》, 1960. 3. 16. 《서울신문》, 1960. 3. 15.(석간)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채상병 특검법 5월 통과도 늦는다, 석달 후면 통화기록 삭제"
- 이재용 무죄, 경제학자가 최악의 판결로 보는 까닭
- 이 바닥은 이렇다고? 예능작가가 본 '나는 솔로' 논란
- 2시간 먼저 '조조참배' 윤 대통령... 조국 "첫 악수 무산 아쉽다"
- '부러진 연필 조각' 수백개, 1억 년 비경 숨겨진 섬
- 윤 대통령 지지율 23%, 취임 후 최저...부정 68%
- 학력-외모-직업 대신 이것, '연애남매'가 깬 고정관념
- 이스라엘, 이란 본토 타격... 공습 6일 만에 재보복
- 술판 회유에 김성태 "비상식적"... 검찰은 세번째 반박문 발표
- 순직 인정 안 됐던 무녀도초 교사, 시간 외 업무기록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