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연필 자루' 수백개, 1억 년 비경 숨겨진 섬

이광표 2024. 4. 1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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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의 보석, 신안 천사섬 35] 주상절리의 보고, 만재도

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 <기자말>

[이광표 기자]

목포에서 105km 떨어진 신안군 만재도. 예전엔 만재도에 가려면 목포에서 5시간 30분 이상 걸렸다. 여객선 접안시설이 없어 바다에서 종선(從船)으로 갈아타고 섬에 들어가야 했다. 지금은 쾌속선을 타고 2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2021년 접안시설과 경사식 선착장이 생겼다. 남해고속 뉴퀸호는 매일 목포항을 출발해 만재도를 거쳐 가거도까지 오간다. 만재도 주민들은 아침에 목포로 나가 일을 본 뒤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다. 만재도가 목포와 하루생활권이 된 것이다.

그래도 만재도는 멀고도 작은 섬이다. 면적은 0.59㎢. 선착장에 내리면 바로 앞에 짝지해수욕장이 있고 그 뒤편으로 푸른 지붕을 한 가옥 30여 채가 보인다. 그게 마을의 전부다.

만재도는 세 개의 산으로 이뤄져 있다. 선착장에서 보면 세 개의 산은 T자로 연결되어 있다. 오른쪽(북동쪽)은 소나무가 무성한 부드러운 분위기의 마구산(176m), 가운데(서남쪽)와 왼쪽(동남쪽)은 바위 가득한 물생이산(143m)과 장바위산(135m). 마을 사람들은 마구산을 큰산, 장바위산을 앞산이라고 부른다. 물생이산과 장바위산은 그 육중함으로 분위기가 범상치 않다.
 
 선착장에서 바라본 신안군 흑산면 만재도 마을.
ⓒ 이광표
   
 만재도 마을 초입 돌담길의 ‘커피 혜자네 주막’ 간판. 바로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TV 예능프로 ‘삼시세끼 어촌편’을 촬영했던 곳이 나온다.
ⓒ 이광표
 
짝지해수욕장은 모래가 아니라 자그마한 몽돌이 깔려 있다. 물은 맑고 해안선은 부드럽게 휘어져 있다. 해안선 끝자락에 크고 작은 바위들이 즐비하고 장바위산으로 이어진다. 짝지해수욕장 뒤편엔 '만재도' 표석이 있고 좁은 돌담길이 여러 갈래로 흩어진다. 가옥 벽체는 돌담에 감춰져 있고 파란 지붕만 보인다.

이곳은 골목골목이 모두 돌담이다. 채소밭까지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서다.

멀고도 작은 섬이지만 이곳 돌담 풍경은 왠지 익숙한 듯하다. TV 예능프로 '삼시세끼 어촌편'을 촬영한 곳이기 때문일까. 돌담길 초입엔 '화평이네 민박', '커피 혜자네 주막', '만재도 슈퍼' 같은 간판이 보인다. 혜자네 주막 골목으로 들어가면 첫 번째 집이 삼시세끼를 촬영했던 곳이다. 커피주막과 슈퍼는 성수기 때만 간혹 문을 연다. 혜자네 주막에서 커피를 마시지 못해 좀 아쉬웠으나 햇볕 좋은 4월 초 오후, 바닷가 좁은 돌담길을 걷는 건 매력적인 경험이었다.

화려했던 가라지의 추억

섬 이름 만재도(晩財島)는 "해가 지고 나면 고기가 많이 잡힌다" "재물을 가득 실은 섬"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이름에 걸맞게 1930~1960년대엔 돈섬, 보물섬으로 불리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만재도 근해에서는 가라지가 많이 잡혀 '가라지 파시'가 성행했다. 전갱잇과의 가라지는 고등어보다 크고 맛이 좋아 고급 어종으로 꼽혔다. 소금으로 간을 해 말린 뒤 구워 먹으면 특히 일품이었다고 한다. 가라지는 가거도나 상태도에서는 보이지 않고 유독 만재도 인근에서만 잡혔다. 한창일 때엔 가라지를 잡는 어선, 가라지를 구입하려는 상선 200여 척이 몰려 만재도 앞바다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흑산도, 가거도, 맹골도, 상태도 등지에서 상인들이 들어와 해변에 천막을 치고 술집을 차렸다. 작은 섬에 그런 술집이 10여 곳을 넘었다고 한다. 만재도 펜션 운영자는 "그 시절 가라지 생선 두세 마리만 들고 가게에 가면 이것저것 여러 생필품으로 바꿔올 수 있었다"고 했다. 가라지가 얼마나 비싼 값에 팔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가라지가 급격히 사라졌고 외지 어부들도 만재도를 떠났다. 이후 1970년대부터 주민들의 생업은 해조류 채취와 소규모 고기잡이로 바뀌었다. 여름에는 미역 전복 홍합 해삼 등을 채취하고 봄 가을에는 주낙이나 낚시로 우럭 농어 장어 등을 잡는다. 여름이 되면 선착장이나 해수욕장에서 돌미역, 홍합 등을 손질하는 주민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른 아침 갓 잡은 열기(볼락)을 열심히 손질하는 만재도 주민들.
ⓒ 이광표
 
만재도 앞바다에선 열기(볼락)도 많이 잡힌다. 둘째 날 아침, 열기잡이 배가 들어오자 주민들이 선착장에서 열심히 열기를 손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붉은색의 열기는 첫눈에도 살이 통통하고 탄력이 넘친다. 이렇게 잡아 정리한 열기는 곧바로 주문자에게 택배로 배송된다. 열기는 살도 많고 비린내도 적어 맛이 담백하며, 구이 조림 찜으로 요리하기에 좋아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다.

만재도에서는 사시사철 등산객과 낚시꾼들을 만날 수 있다. 등산 출발점은 만재도 펜션. 흑산초등학교 만재분교(2005년 폐교) 건물을 마을부녀회에서 펜션으로 운영하고 있다. 짐을 풀기 위해 펜션에 들어서자 삼시세끼 제작진·출연진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찍은 큼지막한 사진이 걸려 있다.
 
 만재도 마구산 등산로에서 내려다본 장바위산.
ⓒ 이광표
 
만재도 펜션 바로 위 내연발전소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물생이산과 마구산으로 갈라지는 등산로가 나온다. 4월 초라서 그런지 유채꽃이 많이 피었다. 물생이산은 바위산이어서 가는 길이 다소 험하지만 마구산 등산로는 적당하다. 마구산은 만재도에서 가장 높은 산. 마구산 쪽으로 조금 더 가면 일출과 일몰의 명소인 샛개재가 나온다.
왼쪽으로는 석양을 볼 수 있고 오른쪽으로는 일출을 볼 수 있는 곳. 샛개재에서 마구산 정상으로 가는 길엔 키 작은 억새가 무성하다. 석양의 억새들이 은빛으로 출렁인다. 등산로 자체는 무난하지만 왼편은 급경사 낭떠러지다. 그 낭떠러지 뒤로는 바위섬(내마도, 외마도)이 있고 그 너머 석양 풍경이 가히 일품이다.
 
 마구산 샛개재에서의 일몰 풍경. 앞에 보이는 바위섬이 내마도, 외마도다.
ⓒ 신안군
   
 마구산 정상의 무인등대.
ⓒ 이광표
 
억새밭, 대나무밭, 소나무숲을 지나 마구산 정상에 오르면 자그마한 무인 등대가 나온다. 이곳에 서면 가거도, 태도, 홍도, 장도, 흑산도, 영산도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등대는 억새 사이로 다소곳하게 서 있지만 그 뒤로는 까마득한 절벽이다.

바로 이곳이 만재도 주상절리(柱上節理)의 하이라이트 지점이다. 다음 날 아침, 마구산 샛개재에 다시 올라 일출을 감상했다. 바위덩어리 장바위산 옆으로 천천히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은 경외감 그 자체였다. 만재도는 일출과 일몰을 모두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다.

만재도는 여름엔 돌돔과 농어 낚시가, 겨울엔 감성돔 낚시가 인기다. 그중에서도 가장 성수기는 감성돔이 잘 잡히는 12월. 1월로 접어들면 감성동 마릿수가 크게 줄기 때문에 마니아들은 12월을 놓치지 않는다. 배편이 많지 않기 때문에 진도와 목포에서 낚싯배를 구해 만재도를 찾는 경우가 많다. 만재도에 도착하면 낚시 전문 민박집에 머물면서 종선으로 갈아타고 낚시 포인트로 진입한다. 낚시꾼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은 장바위산 갯바위.

1억 년 역사가 여기에... 오는 6월 천연기념물 지정 예정  

만재도의 바위 지형은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주상절리다. 주상절리는 화산 활동 중 지하에 남아있는 마그마가 식는 과정에서 수축하고 갈라지면서 만들어진 화산암 기둥들이다.

만재도에선 마구산 등대쪽 해안절벽과 장바위산 동쪽 해안절벽을 따라 400m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특히 수직절리가 잘 발달했고 이 절리를 따라 급경사 절벽들이 형성됐다.
 
 만재도 해식절벽에 형성된 주상절리, 부러진 연필 조각 수백여 개를 세워놓은 듯 신비롭고 장쾌하다.
ⓒ 신안군
   
 만재도 주상절리는 한 달여 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
ⓒ 신안군
 
만재도 주상절리는 부러진 연필 자루 수백여 개를 세워놓은 듯 신비롭고 장쾌한 풍경을 연출한다. 수직절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수평절리가 더해져 절리의 간격과 방향이 각양각색이다.

비경도 비경이지만, 백악기의 화산 분화 및 퇴적 환경 해석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지질학적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은 이러한 가치를 높이 평가해 최근 만재도 주상절리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로 했다. 오는 6월이면 천연기념물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 멋진 풍경을 육안으로 감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산에서는 볼 수 없고, 바다에서 배를 타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주상절리 유람선은 운행하지 않는다. 이 비경을 감상하려면 마을 주민들을 통해 별도의 배를 예약해 이용해야 한다.

그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방법이 있다. 짝지해수욕장과 장바위산이 만나는 지점에는 물때에 따라 바닷물에 잠겼다 드러나는 작은 바위들이 즐비하다. 이 바위에도 무수한 절리가 형성되어 있다. 한참 보고 있노라면 미니어처 주상절리 같은 생각이 든다. 만재도는 도처가 주상절리의 보고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만재도: 전통한선과 어로민속조사 보고서》, 2008 배석환, 〈안개 속에 피어난 만 가지 이야기, 만재도〉, 《우리바다》 538호, 수협중앙회, 2017 이승하·홍선기, 〈섬지역 생태관광 활성화를 위한 신안 만재도 지질공원 지정 필요성과 기대효과〉, 《인문사회과학연구》 24권 2호,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23 천기철, 〈동쪽으로 날아오르는 한 마리 저 새를 보라!〉, 《사람과 산》 2020년 9월호, 월간 사람과산 최홍길, 〈맛있는 섬여행 섬에서 삼시세끼〉, 《투어코리아》 2020년 7월호, 태건미디어 홍경일, 〈원조 감성돔 낚시가 처음이라고요? 신안 만재도를 추천합니다〉, 《낚시춘추》 2022년 1월호, 황금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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