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구구식으로 결정한 뒤 '그럴싸한' 이유 만드는 사람들

한림대 심리학과 최훈 교수 2024. 4. 19.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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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의 이것도 심리학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나는 왜 그 행동을 했을까?

여행 가방이 하나 필요했다. 2~3박 정도 짧은 출장에 필요한 가방이. 일단 필자가 필요한 조건을 목록화해봤다. 짧은 출장 여행용이고, 비행기를 탈 때 핸드 캐리할 것이기 때문에 크기가 작아야 했다. 공항에서 보안 검색을 대비해 노트북을 쉽게 넣고 뺄 수 있어야 했고, 이를 위해선 보호패드가 있는 노트북용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짐을 넣고 빼기 쉽도록 180도로 벌어져야 했고, 지하철로 공항까지 이동하는 경우가 많으니 전체적으로 튼튼해야 했다.

이 조건을 머릿속에 새기며 열심히 며칠 밤을 인터넷 검색으로 보낸 결과, 내가 선택한 상품은 노트북을 넣는 곳이 따로 없고, 비행기 핸드 캐리가 가능할지 의문이 되는 사이즈의, 그래도 멋진 디자인을 가진 가방이었다. 결제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이 생각만 있었던 것 같다. “가방은 역시 디자인이지!”

쇼핑을 하면서 초심을 잃어버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검색 과정에서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는 경우도 많고, 너무나 다양한 선택지를 보고 있으면 초심을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초심이 완벽하게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술사이자 심리학자인 피터 요한슨(Peter Johannson)은 흥미로운 실험 하나를 진행했다. 실험 참가자에게 얼굴 사진 A, B를 보여주고, 둘 중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얼굴을 선택하라고 했다. 참가자가 하나를 선택하면, 실험자는 그 선택한 사진을 참가자에게 건네주며, 왜 이 사진을 선택했는지 이유를 물어보는 간단한 실험이었다.

하지만 이 간단한 실험 속에는 간단하지 않은 트릭이 숨어 있었는데, 그건 마술사이자 심리학자인 실험자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실험자는 실험 도중 마술 트릭을 써서 참가자가 선택하지 않은 사진을 건넸다. 즉, 참가자가 A 사진을 선택했다면, A 사진을 건네주는 척하면서, B 사진을 건네줬던 것이다. 참가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는 사진을 보면서 왜 그 사진을 선택했는지 이유를 말해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인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반응했을 것 같은가? 영민한 우리의 독자들은 ‘어? 저 이 사진 선택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말했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제 실험 결과는 사뭇 달랐다. 대부분 참가자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사진을 건네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더 나아가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시키는 새로운 이유를 찾았다. 예를 들면 A 사진 속 사람이 금발이었고 B 사진 속 사람은 검은 머리였다면, 실제로는 A를 선택했던 참가자가 실험자로부터 건네받은 B를 보고는 ‘나는 검은 머리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이 사진을 골랐어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 선택의 결과와 원인을 인식하지 못하는 현상을 ‘선택맹(choice blindness)’이라고 한다.

우리는 스스로 합리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이유가 있고, 그 목적에 맞는 행동을 취한다고 믿는다. 즉 ‘WHY’가 선행하면 ‘WHAT’이 뒤따른다. 배가 고프니 밥을 먹고, 추우니까 옷을 더 입고, 심심하니까 휴대폰을 만지게 된다. 하지만 의외로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즉 ‘WHAT’이 ‘WHY’를 정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배가 불러도 습관적으로 밥을 먹으면서 ‘배가 고파서’라는 합리적 이유를 만든다.(이를 다이어터들은 거짓 배고픔이라고 한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지부조화도 이런 현상과 관련이 깊다. 인지부조화는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믿음이 자신이 처해진 상황과 맞지 않을 때 마음 속에 생기는 불편함을 말한다. 인지부조화가 발생하면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스스로 믿음이나 행동을 변화시킨다. 한 노동자가 자신이 하고 싶은 업무는 아니었지만, 연봉이 높다는 이유로 한 회사를 선택해 취업했다. 그런데 이후 자신과 동일한 업무를 담당하는 다른 회사의 노동자가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인지부조화가 발생한다. 본인이 선택한 회사가 최고 연봉 수준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던 믿음이 다른 회사에서 더 높은 연봉을 제공한다는 현실과 충돌하는 셈이다. 이때 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선택하게 된다. 높은 연봉을 주는 회사로 이직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만, 이직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변화시킨다. 자신이 현재 일하고 있는 회사를 선택한 것이 연봉이 높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업무가 매우 가치 있고 자신은 그 업무를 사랑하며, 자신의 회사는 연봉 외에도 직원들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따뜻한 분위기의 좋은 회사이기 때문이라고 믿어 버린다.

하루에도 수 없이 의사 결정을 하지만, 합리적 의사 결정자로서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우리는 주먹구구식으로 결정하고,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붙인다. 그러니 우리의 결정에 다시 한 번 그 이유를 곰곰이 살펴보는 노력도 필요할 것 같다. ‘왜 이 상품을 샀는지’를 포함해서 ‘왜 그 친구를 미워하는지’, ‘왜 부모님에게 냉랭하게 이야기했는지’, ‘왜 게임에 몰두해서 어제 밤에 잠들지 못했는지.’ 그 정답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지금 쉽게 떠 오른 그 이유가 진짜 이유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명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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