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회초리 맞고, 선거제에 화풀이하는 이상한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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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희 기자]
▲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 첫날, 길고 긴 비례대표 투표용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5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사전투표소에서 사전투표사무원들이 투표용지를 출력하고 있다. 긴 비례대표 투표용지가 눈길을 끈다. |
ⓒ 이정민 |
사람은 누구나 적당히 '아전인수(我田引水)' 하며 산다. 내 논에만 찰랑찰랑 물을 채우고 싶은 이기심이 있다. 옛 사람들은 그래서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도 남겼다. 꼭 100%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진 않더라도, 욕심을 채우는 일은 정도껏 하라는 선조들의 가르침 아닐까. 그런데 지나친 아전인수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우기는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된다. 22대 총선 참패로 후유증을 앓고 있는 보수진영의 모습이 그렇다.
16일자 조선일보는 <비례 무효표 130만 표 역대 최대, 이 선거법 폐지해야>란 사설에서 "이번 총선 비례대표 투표에서 나온 무효표가 130만 9931표로 전체의 4.4%에 달했다. 역대 가장 높은 수치라고 한다"며 "무효표는 단순 오기(誤記)일 수도 있지만 상당 부분 어디를 찍어야 할지 몰랐거나, 아무도 찍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로 볼 수 있다"고 짚었다. 그런데 이 신문은 그 원인을 정당들의 난립, 그리고 그 상황을 초래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 찾았다.
▲ 4월 16일자 <조선일보> 사설 |
ⓒ 조선일보PDF |
"비례대표 무효표 비율은 18~20대 총선에서 각각 1.6%, 2.2%, 2.7% 수준이던 것이 현행 선거법이 적용된 21대 총선 때 4.2%로 뛰었다. 이 선거법의 핵심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의원들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누더기 내용이다. 전 국민 중에 이 제도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이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떴다방'식 위성정당의 난립을 부채질한다는 것이다."
지역구에서 초과의석이 발생한 거대정당에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하지 않는 연동형 비례제(한국은 정당 득표율의 절반만 반영하는 준연동형)를 악용, 비례 후보만 내는 군소정당들이 득세하는 것도 문제는 문제다. 그 결과 전체 47석 중 30석만 연동형 비례제를 적용했던 4년 전 총선 당시 35개 정당이 나왔던 비례대표 정당 투표용지 길이는 48cm에 달했다. 비례 의석은 한 석 줄었지만 46석 전체가 연동형인 이번 총선에선 38개 정당의 출현으로 투표용지가 더욱 길어졌다.
그런데 '역대 최대 무효표'의 원인은 정말 선거제도에 있을까? 게다가 이 신문은 4일 전 칼럼 '만물상'에서 "무효표는 고민의 산물로 기권보다 더 적극적인 의사 표시"라며 이번 총선에서 세종갑과 경기 수원정에서 나온 무효표를 국민의힘도 싫고 민주당도 싫은 유권자가 "최소한의 양심"을 담은 결과라고 평가했다. 지역구 선거에서 행사한 무효표는 '양심'이고, 비례 선거에서 행사한 무효표는 '비양심'이라는 뜻인가. '1등 신문'이 내세울법한 논리라고 하기에는 다소 헐겁다.
▲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3년 4월 10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전원위원회에서 선거제 개편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
ⓒ 남소연 |
현행 소선거구제와 연동형 비례제가 무결점이란 뜻은 아니다. 하지만 지역구 선거의 무효표를 거대 양당 체제에서 대결만 남은 정치에 신물 난 유권자들의 의사 표시로 해석한다면, 비례 선거의 무효표 역시 비슷한 잣대로 풀이해야 하지 않을까. 또 소선거구제가 문제라면 중대선거구제 혹은 결선투표제나 선호투표제 같은 대안을 말하거나 연동형 비례제의 경우 너무도 당당하게 위성정당을 만드는 국민의힘, 거기서 핑계를 찾는 민주당의 책임을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보수진영은 잊을 만하면 '연동형 비례제의 복잡한 산식'도 비난한다. 계산법이 어렵다고 치자. 그런데 우리는 무슨 부품과 어떤 알고리즘인지 파악해 스마트폰을 사용하진 않는다. 어린 아이여도 작동법만 익히면 쓸 수 있다. 선거제도라고 다르지 않다. 유권자들이 그 원리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바람직하지만, 중요한 것은 선거제도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느냐다. 국민들이 주목해야 할 대목은 어떤 선거제도가 그 역할에 충실하냐지, 의석수 계산법이 아니다.
▲ 한동훈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10일 국회에서 22대 총선 선거개표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
ⓒ 공동취재사진 |
오죽하면 장세정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4월 15일자 칼럼에서 "선거제도를 원망하는 목소리는 일리가 있지만, 버스 지나간 뒤의 뒷북일 뿐"이라고 했을까. 이번 총선 결과로 드러난 민심은 분명하다. 윤석열 정권 심판. '내 마음 몰라준다'며 국민을 탓하는 이상한 반성문이나마 내놓은 윤 대통령도 인정한 부분이다. 겨우 개헌저지선만 지킨 여당의 처참한 성적표는 국민들이 정부의 실정에 회초리를 들었기 때문이지, 선거제도 탓이 아니다. 고쳐야 할 것은 한국 정치 그 자체다.
진짜 선거제도의 문제점은 가뜩이나 부족한 비례 의석 탓에 위성정당이라는 '꼼수'가 횡행하는데 거대양당이 그마저도 줄이고, OECD 평균의 절반 규모로 국회의원 기득권만 강해지는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 때마침 김진표 의장은 외부전문가들의 독립기구 '국회의원선거제도제안위원회'를 설치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정말 선거제도를 바꿔야겠다면, 이참에 국회가 아예 선거제도에서 손을 떼면 어떨까. 견강부회는 그만하고, 이런 토론을 하자.
[관련 기사]
대한민국 국회의원 팩트체크 https://omn.kr/23k8o
[논쟁] 선거제도를 말한다 https://omn.kr/22b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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