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칼럼] 복화술사의 인형들

2024. 4. 18.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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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광운대 교수

크게 패했으면 일단 반성부터 해야 하는데 아직 정신들 못 차린 것 같다. 집권 여당이 총선에 패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지만, 그것도 이렇게 압도적인 차이로 패한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 그런데도 그 당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곤 ‘변명’이나 ‘남 탓’뿐이다.

친윤계의 변명부터 들어 보자. 여의도연구원장을 지낸 박수영 의원의 말이다. “참패는 했지만 4년 전보다 의석은 5석이 늘었고 득표율 격차는 5.4%로 줄었다. 뚜벅뚜벅 전략, 가랑비 전략으로 3%만 가져오면 대선에 이긴다.” 아예 현실을 부정하기로 한 모양이다.

「 총선 참패의 최대 원인은 대통령
그런데도 여당선 변명·남탓 행태
대통령 속내 대변하는 인형인가
젊은 정치인에게 희망 걸 수밖에

4년 전 선거는 ‘K 방역’의 성과로 민주당과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하늘을 찌를 때. 그때 국민의힘은 야당이었고, 탄핵 여파로 당이 거의 궤멸한 상태였다. 대선에서 이겨 집권여당 행세하는 지금의 성적표를 왜 그 시절의 것과 비교하는지. 지금 필요한 게 위안인가?

그의 바람과 달리 유권자의 인구학적 지형은 여당에 불리하다. 여당 표밭인 노년층에 586세대가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60대쯤 되면 보수화 경향을 보였으나, 이 세대는 늙어서도 젊은 시절의 정치성향을 유지하는 ‘코호트’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

이어서 남 탓.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총선 과정에서 대선 행보를 했다. 윤 대통령의 대선 조직을 반윤, 친한 조직으로 바꿨다.” ‘대통령의 멘토’라 불리는 이(신평 변호사)의 말이라 그런가? 문득 이 얼빠진 소리가 어쩌면 대통령의 속내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이 든다.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이 야당 선거대책위원장 노릇을 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디올백 담화, 이종섭 출국, 황상무 망언, 의사 파업 담화 등 중요한 고비마다 국민의 염장을 제대로 질러댐으로써 야당 압승의 결정적 기여를 한 게 바로 대통령 아니었던가.

마치 모래에 머리를 박은 타조를 보는 듯하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총선 참패의 책임자로 응답자의 68.0%가 윤석열 대통령을 지목했고,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라는 응답은 10.0%에 머물렀다. 국민의힘 지지층도 윤 책임 70.4%, 한 책임은 11.3%라 대답했다.

“전략도 없고 메시지도 없고 오로지 철부지 정치 초년생 하나가 셀카나 찍으면서 나 홀로 대권 놀이나 한 것이다.” 홍준표 대구시장의 말이다. 이는 할 수도 있는 비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본인에게 다가올 특검에게 대처할 일이고, 우리 당엔 얼씬거리지 말라.”

정치는 수십 년 하신 분이 설마 참패의 원인이 대통령에 있다는,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다 알면서 저러는 거다. 한마디로 제 당의 참혹한 패배 속에서 반성은커녕 그저 차기 대권 레이스의 막강한 경쟁자를 제거할 기회만 보고 있는 것이다.

참패의 근본 책임자(대통령)에게는 찍소리 못하면서, 머리 박은 타조 무리의 정서에 편승해 애먼 사람을 물어대는 것은 그 때문일 게다. “문재인 믿고 그 사냥개가 되어 우리를 그렇게 모질게 짓밟던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 사냥개들의 수괴가 바로 윤 대통령 아니었던가?

이들의 공통점은 입술을 움직이면 안 되는 대통령 대신 그의 속내를 말해주는 인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수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 그게 인형들과 그 뒤의 복화술사가 애써 외면하려 하는, 이번 선거의 메시지다.

패배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 어차피 패배의 ‘책임’은 선거를 이끌었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지는 것이다. 본인도 직을 사퇴하며 깔끔하게 책임을 온전히 자신에게 돌렸다. 이 불필요한 희생양 제의는 참패의 원인을 감추어 패배를 연장할 뿐이다.

일찍 끌려 나오는 바람에 그는 많은 것을 잃었다. 막판 과격한 표현의 남발로 도회적 세련미와 합리적 보수의 이미지를 침식당했고, 대통령과 충분히 차별화하지 못해 ‘검사 정권’ 프레임에 함께 묶여 버렸다. 이 부분은 그에게 두고두고 부담으로 남을 것이다.

그나마 이번 선거가 보수에 남긴 희망이 있다면 김재섭, 김용태, 이준석 같은 30대 후보의 당선. 이들은 금배지 달려고 누구처럼 소신을 굽히지도, 최고 권력자에게 아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보수는 부분적으로나마 세대교체에 성공했다는 얘기다.

이승만 기념관이나 짓고, 박정희 동상이나 세우는 것은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이다. 민주화 서사가 ‘과거’라면 반공과 산업화 서사는 ‘대과거’. 하류의 물을 상류로 퍼 올려 되흘리는 게 ‘미래’일 수는 없지 않은가.

한국 정치의 미래는 어차피 젊은 세대에게 달려 있다. 구원의 전망을 잃어버린 두 진영의 앞날은, 어느 쪽에서 먼저 시효가 다한 구약을 대체할 정치적 신약을 쓰느냐에 달려 있다. 이들 젊은 당선자들 덕에 적어도 그 경쟁에선 보수가 반걸음 앞섰다.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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