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교의 가장자리] 깨어 있구나, 파수꾼이구나

2024. 4. 18. 00:2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루쉰(左), 카프카(右)


루쉰은 1881년생, 카프카는 1883년생으로 두 살 차이인데, 두 작가의 글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24세의 루쉰은 일본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합니다. 미생물학 시간에 교수가 보여준 러일전쟁 영상을 보고 루쉰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러시아군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하는 중국인을 얼빠진 모습으로 방관만 하는 중국인들 모습을 일본에서 봅니다. ‘구경꾼’에 불과한 중국인의 병든 정신을 개조하겠다며 루쉰은 의대를 그만두고 작가가 됩니다. 그의 첫 소설집 『외침』에는 방관자들이 계속 나옵니다. ‘광인일기’에는 약자를 하이에나처럼 물어뜯는 사람들, ‘쿵이지’에서는 시대의 희생자를 조롱하는 사람들, ‘약’에서는 처형당하는 혁명가가 흘린 피를 약재로 팔 생각만 하는 구경꾼들이 등장해요.

「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년
진상 규명 특별법안 폐기 위기
관련 행사 열면 빈자리에 한탄
방관 대신 파수꾼의 관심 절실

올해 100주기가 되는 카프카 문학에도 방관자들이 나옵니다. ‘형제살해’에는 골목에서 사람이 칼에 찔려 살해 당하는 장면을 숨어서 즐기는 팔레스라는 구경꾼이 나옵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는 귀찮은 약자를 외면했으니, 이제 포도주나 마시자는 괴이쩍은 방관자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10장의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하는 사마리아인과 정반대 상황이지요.

2023년 9월 일본 도쿄에서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도쿄본부 주최로 열린 '제100주년 관동대진재 한국인 순난자(殉難者) 추념식'. [연합뉴스]


일본에 유학 간 저는 처음엔 부끄럽게도 이 비극을 몰랐습니다. 윤동주 묘지를 찾아내고 연구하신 스승 오무라 마스오 교수님께서 2001년 피해지역에 함께 가자고 권하셨습니다. 20여 년 동안 학살지를 찾아다니며 조사하고, 몇 편의 논문을 쓰고, 『백년 동안의 증언』을 냈습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나가는 이때, 일본인 시민운동을 함부로 얕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우의 테러에 맞서 평화운동 파수꾼으로 헌신하는 일본 활동가들에게 큰 실례입니다.

‘15엔 50전’(주고엔 고짓센)을 발음 못 하면 학살당한 비극을 담은 장시 ‘15엔 50전’을 쓴 시인 쓰보이 시게지, 조선독립운동가를 변호하고 피해자들을 살핀 변호사 후세 다쓰지, 도쿄 요코아미쵸 공원에서 50년 동안 추도식을 진행해온 미야카와 야스히코 회장, ‘봉선화’ 모임의 니시자키 마사오 선생, 셀 수 없이 많은 일본인이 평생 이 일에 헌신합니다. 하다못해 이 서생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할 때 살짝 커피를 전하며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간바레(고마워요. 힘내세요)”라고 말하고 지나가는 일본인도 계세요.

작년 9월 1일 도쿄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있었습니다. 서생은 ‘간토 학살과 한일 문학’이라는 발표를 했는데, 그날 일본인, 재일 한국 조선인 등 500여 명이나 참여하여 놀랐습니다. 후쿠시마 미즈호 사회민주당 당수도 이날 맨 앞자리에서 메모하며 참여했습니다. 죽음과 수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파수꾼들은 방관하지 않습니다.

한편 내 나라에서 간토 대학살 심포지엄이나 행사를 하면 텅 빈 자리를 보곤 합니다. 왜 이 문제를 방관할까. 아쉬워 한탄하거나 밉상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이렇게 존칭어로 검박하게 글 올립니다.

간토 조선인 학살사건은 명백한 제노사이드, 인종학살입니다. 단순한 한일 관계나 민족주의를 넘어 인류가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인종을 학살하는 제노사이드는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이니까요.

이 문제를 꼭 기억해야 하기에 작년 3월 8일에 유기홍 의원 등 여야의원 100명이 ‘간토학살진상규명특별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교과서에 더욱 자세히 알리고, 온라인 아카이브를 제작, 추도공간 사료관을 건립하며. 매년 9월 1일을 기억의 날로 정하는 등 특별법안에 세세한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직 국회 행안위에 계류 중이어서, 몇 달 전 서생도 국회에 가서 기자회견 했습니다만, 이대로 간다면 19대 국회 때처럼 21대 국회에서도 5월에 회기가 만료되면 자동폐기 됩니다. 이번 회기에 꼭 통과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4월 23일 화요일 국회에서 간토 대학살을 주제로, 무라야마 도시오 작가와 서생이 좌담하기로 했습니다.

총선이 끝나고 여러 일로 떠들썩합니다만, 특별법안이 21대 국회에서 확실하게 통과되어, 수고하신 의원들께서 명예로운 마무리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국회에서 입법화하면, 이 사건을 감추고 왜곡하는 일본 정부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43세의 루쉰은 첫 소설집 『외침』(1923)을 냅니다. 원제는 중국어로 ‘나한(呐喊)’, 구경꾼이 되지 말고 “외치자”는 뜻입니다. 카프카는 ‘밤에’라는 짧은 글에 잊을 수 없는 마지막 호소를 새깁니다.

“깨어 있구나. 파수꾼이구나. 왜 너는 깨어있는가. 한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한다.”

방관자가 아니라, 평화의 파수꾼으로 동행해주시기를 바라며, 손 모아 인사드립니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