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냐 바이든이냐…속 타는 재계

배준희 매경이코노미 기자(bjh0413@mk.co.kr) 2024. 4. 17.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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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선발 ‘글로벌 폴리코노미’ 점화
삼성·SK·현대차, 대관 ‘드림팀’ 꾸린다

국내 4월 총선이 일단락된 가운데 재계와 산업계 시선은 오는 11월 예정된 미국 대선을 향한다. 4월 총선 이후 주요국 선거 이슈는 5월 인도 총선, 6월 유럽의회 선거, 10월 브라질 지방선거, 11월 미국 대선 등이다. 이 가운데 국내 산업계 이해관계와 폭넓은 접점을 형성한 정치 이슈는 미국 대선이다. 무엇보다 미국발 ‘폴리코노미(Politics+Economy)’는 북미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국제 통상 질서는 물론, 기술을 중심으로 새로운 규범(Norm) 형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 파급력이 광범위하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AI, 빅데이터, 반도체 등 핵심 기술 영향력은 경제적 측면에서만 규정되지 않으며 정치·안보 요인과 한 몸처럼 작동한다는 게 전문가 진단이다. 이에 미국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을 중심으로 대미 대관 역량 확보 총력전이 펼쳐진다. 트럼프와 바이든, 두 후보 가운데 누가 당선되더라도 기민한 대응이 가능하도록 주요 기업은 정치 진영을 포괄하는 대관 시스템 구축에 사활을 걸었다.

미국발 ‘폴리코노미’는 북미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국제 통상 질서는 물론, 기술을 중심으로 새로운 규범(Norm) 형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 파급력이 광범위하다. 사진은 바이든 대통령(사진 왼쪽)과 트럼프 전 대통령. (AP·로이터)
대미 투자 급증

2차전지·반도체 집중

4월 국내 총선이 마무리되면서 재계에서는 미국 대선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한국 기업이 미국 대선을 주목하는 이유는 최근 수년간 미중 패권 경쟁 틈바구니 속에서 대미 투자를 큰 폭 늘렸기 때문이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대미 투자는 2020년 152억600만달러(약 20조3258억원)에서 2021년 279억3100만달러(약 37조3353억원)로 대폭 늘어난 뒤 증가세가 뚜렷하다. 한국의 대미 투자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3년간 누적 850억2400만달러(약 113조6515억원)에 달한다.

대미 투자는 반도체·2차전지 등 첨단산업 중심으로 이뤄진다.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보조금 지급 등으로 자국 내 공급망 체계 일원화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반도체·2차전지로 투자가 집중됐다. 미국이 반도체를 비롯 주요 전략자산에 대한 중국 견제를 더욱 강화해 국내 기업은 ‘올인 아메리카’ 외 다른 전략적 선택지를 고려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뿐 아니라 ‘칩스법’으로 불리는 반도체법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전 세계 설비 투자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SK하이닉스가 38억7000만달러(약 5조2000억원)를 투자해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AI 메모리용 어드밴스드 패키징 생산 기지를 건설한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짓는다. 추가 투자금 포함 삼성전자의 대미 투자액은 당초 계획보다 2배 늘어난 440억달러가량 된다. 추가 투자금은 테일러 공장과 다른 공장, 패키징 시설, 연구개발(R&D)센터 등 4개 시설을 짓는 데 투입된다.

2차전지 산업도 다르지 않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53억달러를 들여 애리조나주에 원통형·에너지저장장치(ESS)용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생산 공장 착공을 시작했다. 가동은 2026년으로 예상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미 북미에만 8개 생산 공장을 운영·건설 중이다. SK온과 삼성SDI도 수십억달러를 들여 2차전지 생산 기지 건설 투자를 진행 중이다.

민주·공화 모두 줄대기

대관 조직 대거 확충

재계에서는 미국 대선을 ‘회색 코뿔소’에 빗대며 공화·민주 양 진영에 대비한 포괄적 대비책을 세우느라 비상이 걸렸다. 회색 코뿔소는 반복적인 경고로 그 위험성이 충분히 알려져 있고 발생 시 파급력이 크지만, 임박하기 전까지 쉽게 간과하는 위험을 뜻한다. 국내 산업계에서는 선제적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다가 자칫 큰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긴장감이 팽배하다. 미 대선 이후 정권 교체로 정책 변동성이 확대된다면 투자는 물론 중장기 사업 전략까지 송두리째 개편해야 하는 상황을 맞는다.

주요 기업은 대미 대관 조직을 대거 확충하는 등 조직 재정비에 나섰다. 바이든·트럼프 가운데 특정 진영에 매몰된 대관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따른다는 점에서 두 진영을 아우르는 통합 정책으로 포지셔닝 중이다.

SK그룹은 계열사별로 분산돼 있던 현지 대관 조직을 통합해 ‘SK아메리카스’를 신설하고 북미 대관 인력을 확충하고 있다. SK그룹 주력 산업은 에너지, 반도체, 2차전지 등으로 미 대선 민감도가 높다. 지난해 3월 SK그룹은 글로벌 대관 총괄 조직인 GPA(Global Public Affairs·글로벌대외협력)팀을 수펙스추구협의회 아래 신설하고 컨트롤타워 역할을 강화한 데 이어 통합 조직 설립으로 재정비했다.

삼성전자 역시 지난해 말 인사에서 GPA(글로벌퍼블릭어페어스)실에 힘을 실었다. GPA는 삼성전자 해외 법인 관리와 현지 정부, 정치권, 재계 등과 소통·협력 기능을 포괄하는 조직이다. 당초 팀 단위 조직이었으나 김원경 부사장의 사장 승진으로 실 단위로 승격됐다. GPA실은 세계 전역에 진출해 있는 삼성전자 해외 법인과 호흡을 맞춰 여러 이해관계자를 아우르는 비시장 전략을 총괄한다.

현대차그룹은 해외 대관 조직인 GPO(Global Policy Office)를 사업부급으로 격상했다. 지난해 외교부 출신 김일범 부사장을 GPO 수장으로 앉힌 데 이어 성 김 전 주한 미국대사를 자문역으로 영입했다. 최근에는 우정엽 전 외교부 외교전략기획관까지 전무로 데려왔다. LG그룹은 글로벌 대관 총괄 조직인 글로벌전략개발원을 중심으로 각 계열사 간 협력 체계를 강화한다. LG전자와 LG에너지솔루션 등 북미에서 주요 사업을 벌이는 계열사는 글로벌전략개발원과 긴밀한 협업 체계를 가동 중이다.

포스코그룹은 지난해 미국 현지 사업 컨트롤타워인 포스코아메리카를 애틀랜타에서 워싱턴D.C로 옮겼다. 포스코아메리카는 지주사 직속 조직으로, 2차전지, 철강, 자원 개발 등 그룹 핵심 사업과 접점을 형성한 입법, 정책 동향을 수집해 그룹 수뇌부에 보고한다. 한화그룹도 최근 미국 현지 대관 조직 코퍼레이트어페어(CA)팀을 신설했다. 바이든 대통령 상원의원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대니 오브라이언 폭스코퍼레이션 수석부사장을 대관 총괄로 앉혔다. 친트럼프계 인사이자 친한파면서 김승연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에드윈 퓰너 미국 헤리티지재단 아시아센터 회장에게는 그룹 고문 역할을 맡겼다.

주요 그룹이 북미 대관 역량 강화에 사활을 걸면서 국내 대기업이 쓰는 로비액은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이미 지난해 사상 최대치를 경신한 데 이어 올해도 최고치를 갈아치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미국 정치 자금 추적 단체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삼성그룹(삼성전자 미국 법인·삼성전자 반도체·삼성SDI 미국 법인·이매진)의 지난해 미국 로비 자금은 630만달러(약 84억2184만원)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고용한 로비스트도 67명으로 전년 대비 12명이 늘어났다. 재계에서는 삼성그룹의 대미 로비가 2021년 이후 급격한 증가세를 보인 만큼 로비액 대부분이 반도체법(칩스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정책 동향·수집 분석에 쓰였을 것으로 본다. 삼성은 바이든 대통령이 칩스법에 서명한 이후 2022년 하반기에만 전년(372만달러)의 90%에 달하는 320만달러를 로비에 썼다.

한화그룹도 대미 로비 금액 증가세가 가파르다. 2022년 90만달러(약 12억원)를 로비 자금으로 쓴 한화그룹은 지난해 158만달러(약 21억원)를 지출했다. 이는 전년보다 80%가량 증가한 수준이다. 지난해 한화그룹은 전년(5명) 대비 2배가 넘는 11명의 로비스트도 고용했다. 한화그룹은 에너지 산업 투자를 고려한 로비 활동으로 보인다. 한화그룹은 올 연말까지 미국 조지아주에 3조원을 투자해 태양광 종합생산단지 ‘솔라 허브’를 짓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바이든 정부 친환경 정책 폐기를 공언한 만큼, 실제 당선 시 태양광 등 친환경에너지업계 후폭풍이 불가피하다.

기아는 지난해 로비 금액 110만달러(약 14억7000만원)를 집행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LG전자는 지난해 24만달러(약 3억원)를 대미 로비에 썼다. 2019~2022년까지 매년 12만달러(약 1억6000만원)를 대미 로비용으로 지출했던 것에 비춰 2배가량 늘었다. IRA에 친환경 가전 구매에 따른 보조금 지급이 포함돼 이에 대한 대응 역량을 강화하려는 차원으로 풀이된다.

IRA 불확실성 확대될라

반도체는 영향력 ‘중립’

미 대선 풍향 민감도가 상대적으로 큰 업종은 2차전지와 자동차 산업이라는 게 다수 전문가 시각이다. 반면, 반도체 산업은 미 대선 불확실성에 따른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일 것이라는 데 힘이 실린다.

미 대선 결과에 따라 변동성이 크게 확대될 것으로 평가되는 정책은 IRA다. 트럼프 경제 정책의 뼈대는 저렴한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 산업을 되살리고 이를 통한 미국 제조업 경쟁력 강화다. 최근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시간과 위스콘신주 유세에서 당선 시 임기 첫날 전기차 보조금 명령을 폐기하겠다며 날을 세웠다.

국내 전문가들도 IRA 정책의 변동성 확대를 우려한다. 지난 3월 대한상공회의소가 서울 대한상의 회관에서 연 한미통상포럼에 연사로 나선 김선영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친환경 정책에 부정적인 트럼프의 성향을 고려하면 IRA 규정이 무력화될 가능성이 있지만 의회에서 법안 자체를 폐기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면서도 “대통령이 행정명령 등을 활용하는 시나리오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반도체 산업 지원은 둘 중 누가 당선되더라도 정책 연속성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칩스법으로 전 세계 설비 투자가 미국에 집중되고 이는 미국 경제의 소비·고용 확대라는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미국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이 창출하는 투자와 고용은 강도 높은 긴축 충격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는 만큼 지역과 정당을 초월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게 다수 전문가 시각이다. 에너지 산업 역시 우려가 큰 업종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바이든 행정부의 친환경 정책과 IRA 폐기를 공언한 만큼, 한국의 2차전지와 태양광 등 에너지업계 후폭풍이 클 전망이다.

재계에서는 미국 정책 급변으로 타격을 입을 한국 기업에 대한 선제적 대비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 ‘유턴 기업’ 요건을 완화해 퇴로를 열어줘야 한다는 주장이 벌써부터 나온다. 이성우 대한상의 국제통상본부장은 “현재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유턴 기업’으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해외 사업장 2년 이상 운영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데, 미국의 정책적 변화로 인한 투자 철회로 유턴한 경우에는 이런 요건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대미 통상·산업 외교 역량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개별 기업 역량만으로 정치·경제 방정식을 풀기 힘들므로 정부 역시 각계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협의 창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 김정식 교수는 “미국에서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는 보호무역이 강화되고 한국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면서 한국 경제를 둘러싼 불안감이 커질 것”이라며 “자본 이탈, 환율 상승, 투자 감소, 금융 부실 증가 등으로 저성장이 지속되고 인플레이션과 금융·외환위기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5호 (2024.04.17~2024.04.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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