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호의 사이언스&] ‘신의 입자’ 발견한 가속기, 국내서도 반도체·신약에 기여

최준호 2024. 4. 16.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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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별이 졌다. 피터 웨어 힉스(Peter Ware Higgs). ‘신의 입자’ 로 불리는 힉스 입자의 존재를 예측한 그는 지난 8일 영국 에든버러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1929년 5월에 태어나 94년을 살았다. 그의 이름을 딴 힉스 입자는 우주 탄생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 중 가장 유력한 ‘표준 모형’(Standard Model)을 설명하기 위해 정의된 입자다. 표준 모형에 따르면 우주 만물은 6개의 쿼크, 6개의 렙톤, 4개의 매개 입자 등 12개 소립자로 구성된다. 이런 기본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입자가 존재해야 표준 모형이 성립한다. 이것이 힉스 입자다. 그는 35세이던 1964년 조교수 신분으로 힉스 보선(boson·기본입자)의 존재를 예측했다. 그리고 긴 세월이 답답하게 흘렀다. 힉스의 주장은 지극히 논리적이었지만,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이론 물리학의 대가 스티븐 호킹 박사가 동료 과학자와 내기하면서 힉스 입자가 없다는 쪽에 돈을 걸었다가 100달러를 잃었다는 일화까지 있을까. 힉스 입자의 실체가 확인된 건 48년이 지난 2012년 7월.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에 걸쳐있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과학자들이 둘레 27㎞의 거대한 강입자가속기(LHC) 터널에서 입자를 충돌시키는 실험에서다. 우리나라를 포함, 세계 6000여 명의 과학자가 참여했고, 투입 비용만 100억 달러(약 13조원)에 달했다. 힉스 입자가 발견되면서 ‘표준 모형’이 비로소 완성됐다. 힉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기본입자의 존재를 예측한 공로로 84세이던 2013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CERN의 강입자가속기가 없었다면, 힉스 입자의 존재는 여전히 이론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터. CERN은 그렇게 우주 탄생 비밀의 마지막 고리를 풀었다.

「 CERN 가속기, 힉스입자 발견
48년 전 예측 우주의 비밀 풀어
국내도 다양한 가속기 속속 등장
“기초과학과 첨단산업에 필수”

노벨 물리학상의 20%에 기여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강입자가속기(LHC) 터널. 둘레가 27㎞에 달한다. [사진 CERN, 중앙포토]

가속기의 과학적 성과는 힉스 입자 뿐이 아니다. 역대 노벨 물리학상의 20%가 관련이 있을 정도로 노벨과학상의 산실이다. 한편으론 신약 등 바이오산업과 반도체 등 첨단 정보기술(IT) 산업 발전을 위한 필수 장비이기도 하다. 규모도, 목적도 CERN의 강입자가속기와 차이가 있지만, 한국에도 거대 가속기가 속속 들어서고 있다. 지난 12일 기자는 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의 양성광 원장 일행과 함께 경북 포항으로 내려가는 차에 올랐다. KBSi는 2027년을 목표로 ‘다목적 방사광가속기’ 구축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3, 4세대 방사광가속기를 이미 제작·운영하고 있는 포항가속기연구소(PAL)와 협업이 절실하다. KBSi가 포항 3세대 방사광가속기 구축을 이끌었던 신승환 고려대 가속기과학과 교수를 지난 8일 다목적방사광가속기 구축사업단의 2대 단장으로 임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목적 방사광가속기는 일종의 최첨단 거대 현미경이라 할 수 있다. 태양보다 100경 배 밝은 강력한 X선을 활용해 원자 크기의 물질 구조를 분석한다. 기존 현미경으로 볼 수 없는 단백질 구조나 펨토초 즉, 1000조분의 1초간 벌어지는 세포의 움직임까지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기초과학 연구 뿐 아니라 첨단 반도체 공정과 신약 개발 등 다양한 산업 부문에 활용할 수 있는 첨단 장비다. 충북 청주시 오창읍의 54만㎡(약 16만3000여 평)의 부지에 축구장 9개를 합쳐놓은 크기인 6만9400㎡(약 2만1000평) 면적의 시설이 들어설 만큼 가속기의 규모도 기존 연구 장비와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총사업비는 1조 454억원에 달한다.

양성광 원장은 “오창 다목적 방사광가속기는 기본적으로 구조와 원리 면에서 포항 3세대 가속기와 같지만 밝기가 3세대 가속기의 100배에 달한다”며 “국내외 연구자들의 3, 4세대 방사광가속기 이용 경쟁률이 3 대 1에 달할 정도로 이미 포화상태라 새로운 가속기 건설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다목적 방사광가속기가 들어설 오창읍 부지는 현재 토지조성 작업과 공사용 1차선 도로까지 건설된 상태다. 전체 공정률은 20%, 건물과 장비를 위한 설계가 최근 마무리됐다. 신승환 단장은 “지금까지 건물 설계는 KBSi, 방사광가속기 설계는 포항가속기연구소가 주도적으로 해오면서 양 기관이 계속 협의를 해오고 있다”며 “기술적 문제가 없는 만큼 이르면 2027년에 가속기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태준이 시작한 한국 가속기의 역사

충북 오창에 건설될 다목적 방사광가속기. [사진 CERN, 중앙포토]

포항 3세대 방사광가속기는 국내 최초의 가속기다. 1995년 첫 가동 당시 세계 다섯 번째 3세대 방사광기였다. 건설에 1500억원이 투입됐고, 연간 운영비만 100억원이 넘게 드는 초거대 연구시설이지만, 국가가 아닌 민간이 주도했다는 점이 이채롭다. 1988년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이 “첨단 과학연구에 가속기는 필수”라는 당시 김호길 포항공대 총장의 건의를 어렵게 받아들이면서 연구소가 발족했다. 포항가속기연구소는 2015년 4세대 선형 방사광가속기까지 갖추게 됐다.

국내에는 포항 방사광가속기 외에도 각각 2021년과 2013년에 가동을 시작한 기초과학연구원(IBS) 산하 대전 유성 중이온가속기와 원자력연구원 산하 경북 경주의 양성자가속기도 있다.

대전 유성에 있는 중이온가속기. [사진 CERN, 중앙포토]

중이온가속기는 중이온을 광속의 절반 수준으로 가속한 뒤 표적에 충돌시켜,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자연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는 희귀 동위원소를 만드는 연구장비다. 2011년 말에 사업을 착수해, 아직 저에너지 구간(1단계 사업)만 마무리된 상태인데, 1조5000억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됐다. 양성자가속기는 초당 약 12경(1조의 12만 배) 개의 양성자를 가속해 중성자를 만들 수 있는 대용량 가속기다. 지금까지 반도체·자동차·극한환경소재·의료·바이오 등 다양한 분야에 쓰이고 있다.

홍승우 중이온가속기연구소 소장(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은 “가속기는 원자핵의 구조 등 미시 세계 관찰을 통해 자연의 근본 원리를 알 수 있는 첨단 기초과학의 필수시설”이라며 “애초 자연과학적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과학에 기반한 기술의 발전에 따라 다양한 첨단산업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장비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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