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어린이에겐 나쁜 날씨는 없다

이마루 2024. 4. 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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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와 여행하며 느낀 것. 여행하기에 나쁜 날씨란 없다
©unsplash
「 어린이에겐 나쁜 날씨는 없다 」
친정엄마는 벚꽃이 피기 직전 동쪽에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음력 2월을 ‘영동 바람달’이라 부르는데, 이 시기에는 바람의 여신 영동할머니가 인간의 삶을 순방하는 달이라는 것이다. 겨우내 우리가 어떻게 지내왔고, 어떤 생각으로 한 해를 살아갈지 바람처럼 인간과 세상을 살피러 오신다 했다. 그래서 바람달에는 말과 행동을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외할머니 덕분에 재미난 설화를 많이 듣고 자란 나은이는 달, 해, 별, 날씨와 절기에 관심이 많다. 굳은 날씨에도 큰 불만을 가져본 적 없고, 바람달만 되면 바람처럼 집을 떠나는 엄마를 응원하며 이번에는 어디로 여행 갈 거냐고 물을 뿐이다. 이번에는 세 돌이 된 아들을 데리고 여행길에 올랐다. 왜 좋은 날 놔두고 꽃샘추위와 강풍이 부는 날에 여행하냐 싶겠지만, 이는 겨울을 견딘 내게 주는 상이자 다가올 봄날의 응원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함이다.

각오는 했지만 출발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아들의 짧은 다리가 자꾸 앞좌석에 닿는 바람에 앞에 앉은 손님이 항의를 했다. 비행 내내 “죄송합니다”라며 고개를 주억거렸고, 한 시간 내내 아들의 다리를 감싸안고 있었다. 멀미가 난다며 우는 딸을 달래며 진땀을 흘렸다. 많은 이의 날 선 눈빛을 느꼈고, 허공에 사과의 말을 외쳤다. 공항 활주로에서 연결버스를 타는데, 버스의 턱이 높아 배낭과 유아차 그리고 다리가 짧은 아들을 한 번에 들어 올리다 버스 안에서 아이와 함께 넘어지기도 했다. 그 순간 버스 안에서 비명과 탄식이 쏟아졌다. 여자 혼자서 아이 둘을 데리고 여행 온 사람은 처음 봤다며 수군대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 우는 아이들을 달래주는 사람, 접은 유아차를 자신의 다리 사이에 끼워 잡아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처럼 다정한 어른이 몇몇 있었으나, 아이들의 칭얼거림과 소란에 너그러운 어른은 흔치 않았다. 우리는 여행하는 내내 ‘우당탕탕 눈치 보는 여행’을 조심조심 이어가고 있었다. 내 아이들이 나쁜 어린이가 아닐 수 있는 곳, 어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아이다울 수 있는 공간은 자연뿐이었다. 그래서 숲이나 바닷가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피부로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파주행 지하철에서도 어린이와 있는 여성은 나뿐이었다. 지난해 대전역에서 부모님을 기다릴 때가 떠올랐다. 드넓은 역사에서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공간에 어린이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아 충격이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어릴 때 눈길 닿는 모든 곳에 어린이가 있었다. 길가의 돌 틈, 이름 모를 새싹처럼 풍성하고 흔했던 어린이가 이제는 어디서도 보기 힘든 존재가 된 걸까? 나만의 착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2017년에 태어난 어린이들이 입학할 나이가 된 올해 전국에서 150여 곳의 학교가 사라졌으며, 내년부터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노인이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다. 30년 안에는 10대 미만 어린이가 전체 인구의 9%밖에 남지 않는다니 이제는 이 넓은 광장에서 어린이를 마주하는 건 행운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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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런 기사를 읽었다. 서울시 양천구 한 어린이공원에 ‘공놀이를 자제해 달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린 것이다. “이웃 주민들이 공 튀는 소음에 힘들어해요”라는 문구와 함께 농구공과 야구공 그림에 ‘금지’ 표시를 한 삽화도 현수막에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는 ‘멋진 나라야’라며 비꼬는 댓글을 적었다. ‘늦은 밤이나 새벽도 아니고 대낮에 어린이공원에서 놀면서 나는 소리를 자제하라면 어떻게 하냐’며 ‘이래놓고 아이 안 낳는다고 지탄할 자격 있나’라고 적혀 있었다. 인구 절벽 시대에 아이들을 지키는 법,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는 방법을 고민했다. 이보다 더 어려운 시대를 어린이들과 살아낸 선배의 조언도 듣고 싶었다.

나라 잃은 설움과 가난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정환. 자신의 생존이 불확실한 시대에 어린이가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어른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방정환 선생은 그런 어린이에게 관심을 쏟았다. 어두운 시대일수록 희망은 ‘어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을 위해 외국의 아름다운 동시와 동화를 우리말로 옮겼던 그의 신념은 많은 공감과 지지를 얻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지금의 우리보다 더 불안한 시대를 살았음에도 어린이를 부탁하는 어른의 자세는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사회적 지원과 분위기 등 저출생 문제 해결을 위해 선결돼야 할 과제는 많다. 실마리를 하나 더 보태면 바로 어린이에 대한 어른들의 태도다. 사회적으로 최약자인 어린이가 존중받고 환영받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분명 건강한 미래를 맞이할 것이라 믿는다.

지금 이 시기가 봄철을 앞둔 잠깐의 꽃샘추위인지, 빙하기가 될지 확신할 순 없다.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떠날지 말지 고민하는 여행처럼 어떤 선택도 강요할 순 없지만, 적어도 출산과 육아라는 여정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란다. 그들이 씩씩하게 용기 낼 수 있는 사회제도와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아이를 향한 다정한 시선이 더 많이 생겨나야 할 것이다. 딸 나은이와 인구 절벽, 인구 감소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엄마! 나는 그래도 아이를 낳을 거야! 낳아서 행복하게 길러줄 거야!”

돌아보니 여행하기 좋은 날씨는 있어도 나쁜 날씨는 없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우리는 5일 내내 비 맞는 바다와 숲을 보고 왔지만 서운하지 않았다. 영동할머니가 도와준 덕분일까. 오히려 짙은 흙을 품은 노란 유채꽃에 감동받기도 하고, 강한 비바람이 선사한 힘찬 바다의 모습에 용기를 얻기도 했다. 우리는 남쪽의 봄을 당신의 곁까지 잘 밀어 올리고 싶다! 바람처럼 당신에게도 용기의 바람이 불길, 그리고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전지민

전 에코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그린마인드〉 편집장. 여성과 엄마로서 지속 가능한 삶을 고민하는 내용을 담은 〈육아가 한 편의 시라면 좋겠지만〉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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