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교사입니다, '장애인 교원노조'가 필요한 이유는...
[이인호 기자]
2002년 12월 어느 날,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눈부심과 눈물이 흐르는 증상이 함께 나타났다. 책은커녕 자취방까지 가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겨우 자취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날 부랴부랴 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발현된 희귀병으로 인해 앞을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몇 년 안에 완전히 실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내 나이는 27살이었다. 의사의 말이 저주처럼 느껴졌고,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의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앞이 보이지 않았고, 나는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죽음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용기는 없었다. 죽고 사는 것은 신의 영역이었고, 난 죽음을 선택하기엔 삶에 대해 미련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살기로 했다. 114에 전화를 걸어 시각장애인복지관에 연락을 했고, 그렇게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 점자를 익히는 이인호 20대 후반 실명 후,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점자를 배우고 있는 청년 이인호. |
ⓒ 이인호 |
이후 한빛맹학교 고등부를 거쳐 공주대학교 사범대학에서 특수교육을 공부했다. 다행히 3년 만에 조기졸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진 않았다. 모든 강의를 녹음해서 밤마다 반복하며 들었고, 강의가 시작되고 한 달이 넘은 후에야 제작된 전공서적 파일을 받아 거의 외우다시피 하며 공부했다. 4번의 과수석과 2번의 차석으로 무사히 졸업한 뒤 운 좋게도 임용시험까지 통과했다.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나는 한 지적장애 특수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동료 교사들은 친절했고 관리자도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첫 수업에 들어갈 때의 그 떨림과 두려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과 눈맞춤을 제대로 못하면 어떻게 하나란 걱정부터 문제행동이 발생해서 아이들이 다치면 안 될 텐데 하는 염려도 그치질 않았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내 수업에 배정된 사회복무요원이 나의 눈 역할을 대신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수업 준비, 교재교구제작, 공문 및 여러 업무처리 등 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은 산적했다. 학생 급식지도는 물론이고 내 점심식사를 위해 배식받는 일도 혼자서 할 수는 없었다. 그 시절 동료 교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다시 생각해도 고마운 일이다.
첫 발령 이후 수 년이 지나도 장애교사를 위한 교육청 차원의 지원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육청은 장애교원 현황 파악은 물론 지원계획조차 세우지 않았고, 관내 중증 장애교사들의 원성은 커져만 갔다. 사실 그 당시에는 전국 모든 장애교사들에게 제대로 된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자괴감과 우울감에 빠져드는 장애교원을 수도 없이 많이 볼 수 있었고, 나 또한 무기력감을 느끼곤 하였다.
하지만 평생 이렇게 무기력한 교사로 남고 싶진 않았다. 나는 우선 보조공학기기 지원, 장애교원을 위한 지원인력 배정, 업무포털에서의 웹 접근성 보장, 장애교원지원계획 수립 등에 대해 교육청에 요구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전국 시각장애인 교사들의 참여도 독려해 나갔다.
교육청의 장애교원 지원에 대한 인식은 전무했다. 장학사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설득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교사가 될 수 있죠?'라고 반문하는 장학사들도 있었다. 화도 많이 나고 답답한 마음도 컸지만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계속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나 또한 그들처럼 반문했을 테니 말이다.
조금씩 변화는 있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자괴감은 점점 커져만 갔고, 장애교원 한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얻게 되었다.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동료 시각장애교사을 설득하고, 전국의 장애교원을 규합하여 장애인 교원노조를 만들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노조에 대한 낙인효과를 두려워하는 장애교사들이 많았고, 소수의 조합원을 가진 교원노조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에 선뜻 함께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창립 총회 2019년 7월,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창립총회에서 조합원 및 자원봉사자와 함께 찍은 사진. 맨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이인호 초대위원장. |
ⓒ 이인호 |
언젠가 장애인 교원노조가 왜 필요하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였다.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장애교사도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다. 충분한 지원만 이루어진다면 누구보다 수업 잘하는 교사, 업무처리도 능숙한 교사, 동료 교사 사이에서 리더로 인정받는 교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장애교원지원, 적극 나서야
사실 13년 전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 나는 선배 장애교사들을 원망하곤 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교사로서의 삶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지만 신규교사로서의 나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업은 차치하더라도 업무에 있어서 당혹감은 너무도 컸다. 장애교사를 위한 지원계획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후배 교사들에게 원망을 듣고 싶지 않다. 그들이 차별 없는 환경에서 근무하기를 바라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스스로 성취감을 느끼는 교사가 되길 소망한다.
그래서 나는 교육청을 비롯한 교육당국에 장애교사의 근무환경 개선을 위해 끊임없이 요구할 것이다. 장애교원을 위한 지원 계획 마련, 부족함 없는 예산 지원, 연수 및 업무포털에서의 접근성 보장, 교육청 차원의 보조인력 및 보조공학기기 지원, 장애교원 지원을 위한 전문 위원회 신설, 전담 장학사 배정, 장애교원에 대한 긍정적 인식 및 적절한 지원을 위한 교육전문직과 관리자 인식개선 교육 등 내가 요구할 장애교원에 대한 정책은 무수히 많다.
최근 경기도교육청은 장애인 교원 고용 확대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교육감 역시 장애교원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도내 장애교원들은 아직 교육감을 만나지 못했다. 교육감과의 간담회를 가졌다는 다른 시도의 이야기가 자못 부럽기만 하다. 사실 장학사들도 장애교원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 여러 과에 흩어져 있는 현재의 업무분장은 그저 장애교원 현황 파악을 위한 것일 뿐이다. 장애교원 지원을 위해 책임있는 전담 장학사와 위원회를 두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꽃은 홀로 피지 않는다. 바람과 물, 흙과 따뜻한 햇볕이 예쁜 꽃과 그윽한 향기를 만든다. 좋은 교사도 그러하다. 장애교사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책임있는 정책과 교육당국의 관심이 더욱 중요하다. 교사의 행복이 학생에게 전해지고, 학생을 통해 학부모가 다시 행복해지는 학교! 우리 장애교사도 바로 그 출발점에 서는 교사가 될 수 있음을 꼭 기억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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